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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큰 수술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아직 수술 시작도 못하고 대기만 하고 있으려니 일말의 불안감이 떨쳐지지 않는다. 부디 별일 아니길. 애들한테 엄마 금방 퇴원한다고 말했으니 약속 꼭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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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애들 재우고 부부가 맥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게다가 어제 잘 때는 멀쩡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다. 자는 도중에 뒤늦게 취기가 올랐단 말인가.

사무실에 도착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오전 10시 30분 현재 전혀 아니올시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지끈. 그리하여 두통약을 먹을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먹는 방향으로 거의 마음을 굳혀가고 있다. 경험적으로 보건데 이럴 경우 약으로 두통을 끊어주지 않으면 당일은 물론, 그 다음날까지 머리가 심통을 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아내더러 어제 TV 보면서 맥주 한 잔 어떠냐고 할 때 남편 머리 아플까 겁난다더니 딱 그 말대로 되었다. 이런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 줘도 되는 거 아닌가. 아무튼 이렇게 또 한 주가 삐걱거리면서 시작.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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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돌아보면 어느 한 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으랴만, 올해는 유난히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많다. 몇 년 동안 공부한 것도 허사가 되질 않나, 경제적으로도 압박감을 느끼질 않나,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질 않나...

오늘 갑작스런 사고로 컴퓨터를 날렸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랴. 그래서 낯빛이 변한 날 보고도 아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저 인간 가끔 저러지... 오늘 좀 예민하겠군...'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다른 날보다 내 절망의 강도가 높다는 걸 알아차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다.

"컴퓨터가 망가졌어."
"그래? 아예 망가진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어느 정도로 망가졌는데?"
"... 완전히, 싸그리, 모조리, 깡그리, 전부다 ..."
"어쩌다가?"
"몰라. 갑자기 그래."
"OS를 다시 깔면 안 되나?"
"그러면 되겠지만 데이터는 못 살려."
"그 정도야?"
"파티션이 아예 없어졌어."

그렇다. 파티션이 없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다 생기나. 가끔씩 컴퓨터가 망가질 때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용케도 하드 디스크의 데이터는 살렸다. 그래서 OS를 재설치한 후에 몇 가지 번거로운 작업들을 거치면, 수고스럽고 피곤하다는 것만 감내하면 그래도 세상이 그렇게 어두워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파티션이 아예 날아가 버려서 다른 컴퓨터에 붙여도 파일시스템이 아예 인식조차 되지 않게 되었다.

여기까지 말해도 아내는 비록 고개는 끄덕이지만 어떤 사태인지 체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일하던 거 다 날린 거야?"
"그런 건 괜찮아."
"그럼 뭐가 문제야? 아 그렇구나. 공인인증서 다시 받아야 되겠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딸들 찍어놓은 사진이 다 날아갔어."
"그럼 문제가 크구나."

아내의 얼굴도 역시 어두워졌다. 물론 중요한 자료들도 많지만 그거야 다시 고생하면 될 일이다. 이런 일 몇 번 겪다 보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자료들 그거 나중에는 없이도 사는 거 보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그렇지만 아이들 사진은 어쩔 수가 없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은가.

"다른 곳에 사진 복사해 놓는다고 해 놓고선 안 했구나."
"응."
"네이버에는 얼마나 올려 뒀어?"
"글쎄. 확인해 봐야지."
"큰딸 사진도 다 날아갔나?"
"그 정도는 아닐 걸..."

확인해 보니 다행히 올해 7월 초까지 찍은 사진은 포털에 백업해 놓았다. 다만 그 이후로 찍은 사진들은 고스란히 날려 먹은 거다. 게으름은 역시 범죄다. 미리 백업만 해 놓았다면 이런 일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왜 있겠나.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는 인간은 성인군자 아니면 또라이들이라는 거 아니겠나. 나같은 보통 사람들 소 잃기 전에는 절대로 외양간 안 고치잖아.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남편이 너무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니 위로의 말을 해 주려는 것도 있지만, 아내는 원래도 나보다는 포기가 빠르다.

"어쩌겠어. 날아간 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7월 초까진 살렸네. 11월엔 또 바빠져서 사진 찍어놓은 것도 없을테고. 그 사이 몇 달치 날렸네."
"..."
"앞으로 딸들 사진 더 많이 찍어 줘. 그리고 이젠 백업도 좀 해놓고."
"응."
"그리고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좀 쉬어."
"..."

그래도 복구가 안 되는 사고는 너무나 힘들다. 아내는 좀 쉬라고 했지만, 시커면 모니터를 바라보는 건 더 괴로울 것 같다. 그래서 뭐라도 설치하자는 마음으로 찾았더니 작년 가을에 나온 리눅스 CD가 한 장 있다. 이거라도 우선 깔자. 제기랄... 아우 힘들어. 올해 운수가 왜 이러니 정말... ㅠ

하긴 그렇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힘들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나중에 돌아보면 그땐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말한다. 훗날 올해를 돌아볼 때에도 아마 그렇게 말할 거다. "그땐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지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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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태규가 가끔 내 꿈에 나온다. 그렇다. 배우 봉태규 말이다.

가끔 나오는데 매번 역할은 고정되어 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처남과 매부 사이다. 즉 봉태규가 아내의 오빠로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를 하자면, 아내는 딸만 넷인 집의 맏딸이다. 그러니 오빠가 있을 리 만무하다. 남동생도 없는데 하물며 오빠라니. 그런데도 내 꿈 속에서 봉태규와 나는 아무런 어색함이 없이 반갑게 만난다. 봉태규가 나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꿈 속에서의 설정으로는 아내와 나의 나이 차가 좀 나는 듯 싶다. 물론 현실에서는 한 살 차지만...

어쨌거나 우리 둘은 만나서 차도 마시고 당구도 치러 가는 등 극히 일상적으로 논다. 그러면서 주로 하는 얘기의 주제는 아내에 관한 것이다. 우리 부부 사이는 좋은지도 물어봐 주고, 다투었다면 오빠로서 동생에 대한 얘기도 해 주고, 여자들은 공감할 수 없는, 즉 남자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맞장구도 쳐 준다.

이 꿈의 패턴을 살펴보면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지인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둘만 등장한다. 아내랑 오빠(?), 그리고 남편이 함께 등장하지 않음으로 인해 어색하지 않아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내보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배우가 오빠 노릇을 하는 것도 우습고, 그 오빠라는 인간이 우리 부부 사이에 좋았던 일, 안 좋았던 일들을 다 들어주는 것도 우습고, 시시콜콜 다 얘기하는 나도 우습다. 게다가 그 오빠가 하필 왜 봉태규냐. 참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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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부부가 놀러 나갔다. 녹색극장이 아트레온인가 뭔가 하는 아스트랄한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 표를 끊으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는 영화까지 보겠다는 생각은 아니고 그저 여름인데 냉면 한 번 먹어 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소박한 계획이었으나, 고작 냉면 먹으러 은평구에서 서대문구까지 그 먼 길을 나간다는 건 확실히 우리 부부의 세계관과 충돌한다. 그리하여 덤으로 영화 한 편을 집어넣게 된 거였다.

신촌 가는 버스를 타니 가스통 폭발 사고가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 떠올랐으나, 그렇다고 어쩌겠나 뭐. 우리같은 가난한 부부들은 주차할 곳도 마땅찮은 신촌에 차를 끌고 나가느니 그냥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 몸을 맡기는 게 더 경제적이지 않겠나.

영화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조조로 보는 건 더 오랜만이다. 아마 이병헌과 송강호, 이영애가 나왔던 JSA가 마지막이지 않나 싶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아무튼 요새 표 한 장에 8000원이나 하는데 조조는 5000원이라니까 왠지 많은 혜택을 본 것 같다. LG카드 할인도 기대했으나 요런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지난 3개월 평균 카드 사용 실적이 30만원 이상이어야 된단다. 영화 한 편 할인 받으려고 30만원을 쓰는 게 말이 되나. 당연히 패스.

원빈이 나오는 '아저씨'라는 영화를 봤다. 무슨무슨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던 게 아니라 순전히 우리의 메인 이벤트 냉면 계획에 영화는 꼽사리를 끼는 형국인지라 약간은 성의 없이 골랐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막상 고르려 했더니 별로 볼 영화가 없긴 없더라. 그래서 그다지 맘엔 안 들지만 남들 많이 본다는 영화로 골랐다.

극장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평일 조조인데 당연하지 뭐. 우리 부부 말고도 단체로 보러 온 사람들이 몇 있긴 했는데 좌석을 지정한 게 의미 없을 정도의 규모였다. 극장 안은 전반적으로 쾌적하지 못한 상태. 팝콘 냄새인지 와플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심히 느끼한 냄새가 건물 전체적으로 짙게 깔려서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영화 시작하니까 냄새가 가시긴 했지만 아트레온, 청소 좀 잘 하자.

영화 보는 내내 사실 좀 힘들었다. 남들은 박진감 넘친다는데 내가 보기엔 불필요하게 잔인한 액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다. 영화를 보며 느낀 점, 주위의 아저씨들한테 함부로 시비 걸지 말자는 것. 멋도 모르고 까불다간 죽는다 정말... 그리고 또 하나. 무릇 아저씨라면 배가 좀 나와 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감...

힘들게 영화를 봐서 그런지 다 보고 나오니 허기진다. 오전에는 구름이 많았는데 극장 밖으로 나오니 구름 속으로 해가 많이 나왔다. 곧장 오늘의 메인 이벤트, 냉면을 먹으러 갔다. 사실 어제 집에 있으면서 냉면 생각이 나서 시켜 먹었는데, 이게 입맛을 확 버렸다. 아무 말도 없이 주문한지 한 시간 만에 배달해 주질 않나, 맛으로 승부하는 대신 양으로 승부하려는 비빔냉면 때문에 헛배만 부르고 기분 제대로 잡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비빔국수 삶아먹는 건데 그랬다. 사정이 이러해서 오늘 제대로 된 냉면을 먹지 않으면 가슴에 응어리가 질 것 같아서 굳이 날도 더운데 신촌까지 나온 것 아니겠는가.

부부가 신촌에서 자주 가는 냉면집은 현대백화점 후문 쪽에 있는 '함흥냉면'인데, 맛이 그럭저럭 괜찮다. 신촌에서는 '고박사집 냉면'이 더 유명하다는데, 거긴 확실히 맛이 없다고 보증할 수 있다. 그 집에서 파는 건 사실 냉면이라 하기 좀 민망하다. 신촌 '함흥냉면'은 고향 부산의 '원산면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냉면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맛은 지키고 있다. 비교적 무난하달까. 비빔냉면에 나오는 육수도 그럴듯하다. 부부가 이번 여름에 부산에서 먹은 밀면 맛이 별로였다는 얘길 하면서, 만두까지 시켜 먹었더니 배도 부를 만큼 부르다.

점심을 해결했으니 신촌은 언제 떠도 아쉬울 게 없으나, 부부가 언제 또 이렇게 나오겠나 싶어 잠깐 걷기로 했다. 냉면 가게 옆에 있는 팬시점에 들러 딸에게 사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구경도 하고, 맞은 편의 현대백화점에도 잠깐 들렀다. 예나 지금이나 현대백화점은 역시 정이 안 간다는 결론을 뒤로 하고 학교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커피라도 한 잔 하자는 생각에 찻길에서 한 블럭 뒷쪽으로 가 봤다. 예전에 자주 다니던 만화방, '까페 차리려다 실패한 만화동산'은 PC방으로 바뀌었다. 감자탕을 많이 먹으러 갔던 '보은집'도 없어졌다. 정말로 많이 변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여우사이' 정도일까. 돌아보는 김에 대학 1학년 때, 입학하자마자 처음으로 살았던 하숙집이 있던 곳도 가 봤는데, 예전의 낡은 단층집이 헐리고 3층집을 짓고 있었다. 아쉽다.

찻길이 아닌 그 뒷골목은 완전히 변해서 커피나 차를 마실 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큰길로 나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 'Angel in us Coffee'.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곳이더라. 커피 자주 마시는 사람들이야 맛을 구별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다 똑같다. 그래도 이렇게 커피 한 잔 하게 되니까 부부가 오랜만에 마주보며 얘기하게 된다. 결혼 생활 해 본 사람들이야 다 알겠지만, 신혼 때 아니면 부부가 얼굴 마주보면서 얘기할 기회가 어디 그렇게 많던가. 한 사람은 TV 보고, 한 사람은 컴퓨터 들여다 보면서 짤막하게 한 두 마디 얘기하는 정도. 집에서는 커피를 마셔도 각자 한 잔씩 들고 알아서 마시지 이렇게 마주앉지는 않는다. 아내가 며칠 전 오랜만엔 친구들 만나서 논 얘기, 애들 키우는 얘기, 집 문제 얘기, 내가 하고 있는 공부 얘기... 이런저런 얘기 속에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조조 보느라 아침부터 서둘렀는데 하루가 짧다.

커피점을 나설 때에는 해가 완전히 나와서 선글라스 없이는 눈도 못 뜰 정도로 햇살이 따갑다. 학교쪽으로 올라와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신촌은 그래도 접근성이 좋다. 갈아타지 않고 버스 한 번에 이렇게 다녀올 수 있으니 말이다. 방학이라 학생은 얼마 없어도 학교 앞으로 지나가는 차는 여전히 많다.

집에 가서 치우고 뭐하고 하면 애들 데려올 시간이고, 저녁 먹고 애들 씻기로 재우면 또 하루 끝. 오늘 공부는 공쳤다. 아내는 내일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쇼핑하러 나간단다. 애들 데리고 하는 쇼핑은 정신이 없다. 내일은 여유있게 둘러볼 참이란다. 내일 점심은 혼자 먹어야겠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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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아내의 대학 전공 서적 중에서 『韓國漢文學史』라는 양장본의 책을 발견했다. 내 전공이 이래뵈도 역사인지라 끝에 史가 들어가는 책이 어찌 반갑지 않을까. 당연히 내용이 궁금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펴 보았는데...

당연히 내용을 알 수 없는 고사하고 도대체 눈을 둘 곳이 없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漢字로 쓸 수 없는 글자를 빼고는 모두 한자다.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긴 '한국문학사'를 쓴다 해도 한자 없이는 글이 안 될텐데, 하물며 '한국한문학사'임에랴... 그렇지만 본문에 정말 필요한 한자가 있나 하면, 내가 보기엔 이런 평범한 설명까지 한자로 표기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그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려버릴 정도로, 아무튼 가능한 한 모든 영역에서 한자로 도배를 해 놓았다. 혹시 한문 훈련용인가...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책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한문학사'가 굳이 따지자면 '역사'가 아닌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즉 역사와 한문학사가 보편과 특수의 관계가 아니라, 문학과 문학사가 그러한 관계인 것이다. 몇 학기 한문 사료읽기까지 우수한(?) 학점으로 패스했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설마 못 읽으랴...' 하는 맘도 없지 않았으나, 이놈의 책은 한 장만 봐도 숨이 턱 막히고 손발이 저려온다.

이런 무시무시한 책에 아내는 공부 열심히 했는지, 여기저기에 줄도 긋고 주석도 달아 놓았다. 그동안 몰랐는데 업수히 여길, 혹은 쉽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보면 이런 엄청난 공부를 했던 사람인 것이다. 오늘부터 아내를 존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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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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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의 지존 아내에게 주말 낮잠의 의미는 남다르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부대끼고, 집에선 어린 딸과 씨름하고, 거기에 청소며 빨래까지... 주말에 풀어주지 않으면 이놈의 피로를 다음주까지 등에 지고 가야 된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주말 낮잠을 위해 한 주를 달려온다는 말까지 할 지경인데...

    일요일 오후, 딸내미가 오늘따라 엄마의 낮잠에 영 협조를 안 해 준다. 사실 딸이 잠들지 않고서 엄마 혼자 자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딸이 자기가 잠이 안 온다고 순순히 엄마가 낮잠을 즐기도록 허락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자면서 제일 짜증날 때가 왜 잠이 드는 순간에 방해받는 거 아닌가. 의식의 저편으로 막 넘어가려는 찰나에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확 잡아채듯이 딴죽을 걸면 온몸의 맥이 탁 풀리면서, 없던 피로가 어디에서 이렇게 몰려오는지... 아무튼 잠에 대해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다 안다.

    엄마가 재우려고 했을 때 딸이 안 잔다고, 자긴 더 놀고 싶다고 한 것까진 좋았는데, 이놈의 딸내미, 엄마가 고이 자는 꼴은 또 못 보겠나 보다. 엄마가 잠들만 하면 옆에 가서 깨우기를 몇 번...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엄마가 드디어 폭발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오늘...
으아앙~
방에서 당장 나가!
엄마 미안해요~
다 필요 없어. 안 자려면 나가!
으아앙~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게 낫지... 백 번 혼나도 싸다. 결국 딸내미는 방에서 쫓겨나고,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 훌쩍거리는 놈을 내가 떠맡아야 했는데, 아주 난감하다. 일요일 오후에 나라고 어디 힘이 펄펄 남아돌아 딸이랑 뛰어놀겠나 뭐...

    이때 문득 딸이 아직 기어다닐 때 재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혹시 가능할지 모른다. 딸을 안아들고 등을 토닥이면서 '마녀의 택급편' OST를 들려 주었는데, 처음엔 별 반응을 않던 딸이 두 번째 트랙부터 슬슬 몸에 힘이 빠지더니, 다섯 곡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역시 마녀의 힘은 대단하다... 딸의 무의식 저편에 예전의 잠들던 상황들이 여전히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마녀의 택급편 OST 중에서 두번째 곡명은 '旅立ち 타비다치'인데 일본어는 까막눈인 나로선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행을 떠나다'로 해석해야 할지, 혹은 '출발' 정도로 해야할지... 처음에는 다른 곡들에 묻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요새는 이 곡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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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의 목욕물을 받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학창시절의 담임 선생님들의 성함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있나. 초등학교, 중학교 선생님들의 성함은 떠오르는데, 정작 시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선생님의 성함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예외 없는 규칙은 없듯이,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는 내 기억력의 편리한 점 때문인데, 나는 잊고 싶은 안 좋은 기억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지 않는가. 그래서 5학년 때의 선생님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하나도 아쉽지 않고, 또 새삼스럽게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다르다. 비록 내가 고분고분하다거나 모범적이거나 국가관이 투철하다거나 친구들과 원만한 학생이었다고 볼 수 없으려니와, 그러므로 선생님들에게 특별히 좋은 제자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감정도 못 느끼는 후안무치는 아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들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인상을 험악하게 썼는지, 아내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다. 그렇잖아도 낮부터 두통 때문에 그다지 좋은 컨디션이 아닌데다가 나름 심각한 상황이라 대꾸도 별로 곱지 않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학창시절 선생님들 성함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
"난 또... 놀랐잖아. 별 거 아니네..."
"아니, 별 게 아니라니! 선생님 성함이 생각이 안 나는 게 어떻게 별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 인상을 쓰길래 또 머리 아픈 줄 알고..."
"머리도 아파."

    오늘따라 엄마 아빠를 힘들고 지치게 하는 딸내미 때문에 완전 녹초가 되어 있는 아내의 상태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는 나로서도 감정 통제가 쉽지 않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기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너무나 안 좋다. 마치 내 삶의 앨범의 몇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져 나간 것 같다.

    여기까지 쓰면서 다시 고1 담임 선생님 성함은 떠올랐다. 서정원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마누라, 미안하다. 그치만 나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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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onpetit님의 2008년 2월 27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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