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목욕물을 받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학창시절의 담임 선생님들의 성함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있나. 초등학교, 중학교 선생님들의 성함은 떠오르는데, 정작 시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선생님의 성함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예외 없는 규칙은 없듯이,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는 내 기억력의 편리한 점 때문인데, 나는 잊고 싶은 안 좋은 기억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지 않는가. 그래서 5학년 때의 선생님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하나도 아쉽지 않고, 또 새삼스럽게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다르다. 비록 내가 고분고분하다거나 모범적이거나 국가관이 투철하다거나 친구들과 원만한 학생이었다고 볼 수 없으려니와, 그러므로 선생님들에게 특별히 좋은 제자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감정도 못 느끼는 후안무치는 아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들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인상을 험악하게 썼는지, 아내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다. 그렇잖아도 낮부터 두통 때문에 그다지 좋은 컨디션이 아닌데다가 나름 심각한 상황이라 대꾸도 별로 곱지 않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학창시절 선생님들 성함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
"난 또... 놀랐잖아. 별 거 아니네..."
"아니, 별 게 아니라니! 선생님 성함이 생각이 안 나는 게 어떻게 별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 인상을 쓰길래 또 머리 아픈 줄 알고..."
"머리도 아파."

    오늘따라 엄마 아빠를 힘들고 지치게 하는 딸내미 때문에 완전 녹초가 되어 있는 아내의 상태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는 나로서도 감정 통제가 쉽지 않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기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너무나 안 좋다. 마치 내 삶의 앨범의 몇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져 나간 것 같다.

    여기까지 쓰면서 다시 고1 담임 선생님 성함은 떠올랐다. 서정원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마누라, 미안하다. 그치만 나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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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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