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고등학교 때 도종환 선생의 접시꽃 당신과 더불어 양강 체제를 이루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 물론 난 서정윤을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홀로서기 같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손발이 오글거리는 그런 시는 딱 질색. 뭐랄까, 겉멋이 잔뜩 들어간 시라고 해야 하나. 서정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랴, 처음부터 좋아지지 않는 것을…

근데 좋아하지도 않는 시와 시인이 지금 왜 갑자기 생각나는 거지? 그것도 무슨 다른 연상작용에 의해 생각나는 것도 아니면서.

Posted by 도그마™
,
  1. 재밌다. 당연히 문학작품이 재밌어야지 않을까만, 요새 누가 동문선을 재미로 읽을 생각이나 할까. 아무튼 의외의 발견이자 유쾌한 경험.
  2. 대단하다. 이 많은 DB를 어떻게 다 모았을까. 조선 초기의 축적된 문화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3.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편지글(書)이다. 다른 글들과 달리 편지는 지은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즉 받은 사람이 보관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후대에 간행되기 위해서는 받은 사람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지은이가 죽으면 돌려주는 걸까? 돌려주면 누구에게? 아니면 그냥 보관? 그런데 내가 보기에 개인 문집에 자기가 쓴 글은 있어도 받은 편지를 올리지는 않는 걸로 보아, 어떤 경로를 통하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지은이 쪽으로 글을 되돌려주는 어떤 제도적 장치가 있는 모양인데...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다. 예전엔 명망가가 죽으면 그 사람이 쓴 글을 다시 수집하는 절차가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
  4. 요즘처럼 종이에 글을 남기지 않는 세상에는 후대에 어떻게 글을 전할까.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의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다 정리해야 할까. 그건 그렇다고 해도 편지는? 이메일 계정을 뚫어야 하나? 보낸 편지함이라는 게 있으니까 굳이 글을 다시 받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5. 어쨌거나 이제는 新東文選 또는 증보판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닐까. 아니, 난 모르지만 이미 그런 작업이 되어 있거나 최소한 진행중일지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교과서를 통해 낯익은 정지상의 시 한 수 인용.

송인送人 / 정지상鄭知常

비 갠 긴 언덕엔 풀 빛이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울먹이네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 마를거나 / 大同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 눈물 강물을 더하는 것을 / 別淚年年添綠波

(동문선 제19권, 칠언절구七言絶句 中)

Posted by 도그마™
,

책장을 정리하다가 아내의 대학 전공 서적 중에서 『韓國漢文學史』라는 양장본의 책을 발견했다. 내 전공이 이래뵈도 역사인지라 끝에 史가 들어가는 책이 어찌 반갑지 않을까. 당연히 내용이 궁금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펴 보았는데...

당연히 내용을 알 수 없는 고사하고 도대체 눈을 둘 곳이 없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漢字로 쓸 수 없는 글자를 빼고는 모두 한자다.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긴 '한국문학사'를 쓴다 해도 한자 없이는 글이 안 될텐데, 하물며 '한국한문학사'임에랴... 그렇지만 본문에 정말 필요한 한자가 있나 하면, 내가 보기엔 이런 평범한 설명까지 한자로 표기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그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려버릴 정도로, 아무튼 가능한 한 모든 영역에서 한자로 도배를 해 놓았다. 혹시 한문 훈련용인가...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책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한문학사'가 굳이 따지자면 '역사'가 아닌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즉 역사와 한문학사가 보편과 특수의 관계가 아니라, 문학과 문학사가 그러한 관계인 것이다. 몇 학기 한문 사료읽기까지 우수한(?) 학점으로 패스했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설마 못 읽으랴...' 하는 맘도 없지 않았으나, 이놈의 책은 한 장만 봐도 숨이 턱 막히고 손발이 저려온다.

이런 무시무시한 책에 아내는 공부 열심히 했는지, 여기저기에 줄도 긋고 주석도 달아 놓았다. 그동안 몰랐는데 업수히 여길, 혹은 쉽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보면 이런 엄청난 공부를 했던 사람인 것이다. 오늘부터 아내를 존경해야겠다...

Posted via email from monpetit's posterous

Posted by 도그마™
,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1996.01.01
평점

인상깊은 구절
종말이 가까워질 무렵, 황제는 자기 주위의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후궁들과 법가 신하들을 모두 죽인 뒤에, 황제는 철기 기술자인 자기 스승에게 명하여 철제 꼭두각시들을 만들게 했다. 자기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신하들은 오로지 그 꼭두각시들뿐이었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세상에는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들이 있다. 백과사전류는 그런 용도로 쓰기 딱 좋은 책이다. 항목별로 짧게 끊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책을 덮어도 부담이 없다. 화장실에서는 단편소설도 부담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한 편 다 보고 나가려다가 다리 저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또한 백과사전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굳이 책갈피로 표시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잡히는 대로 눈이 가는 대로 훑어가면 된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돈 주고 사지 않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이 집에 한 권 있다. 바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다. 당연히 사서 보는 책은 아니다. 누군가가 아내에게 선물한 책이다. 세상에는 이른바 어이없이 뜬 소설가도 있기 마련인데, 베르베르가 딱 그런 인물이다. '개미'를 읽을 땐 나름 신선한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 작품인 '타나토노트'를 보면서 경악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윤회'라는 개념을 천박하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글을 쓰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아니나 다를까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전혀 먹어주지 않는 이 사람의 책을 어째서 우리는 자꾸자꾸 팔아 줘서, 이 말도 안 되는 상상력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 혼자라도 이 사람의 책을 팔아 주지 않는 것이 인류 공영을 위하여 조금이나마 일조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그 이후로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작가인데, 어쩌다가 이놈의 책이 우리 집에 굴러들어왔는지... 책으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그래도 '개미'는 제대로 봤기 때문에 그 속에 등장하는 '... 지식의 백과사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데다가, 이 책을 보면서 지금은 다 까먹은 '개미'의 스토리도 조금씩 생각나게 하는 효과도 있어서, 무엇보다도 요즘 화장실에서 읽을 만한 마땅한 소스가 떨어진 마당에, 이 책은 이 공간에서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베르베르에 대한 나의 심한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막상 읽어보니 꽤 재밌는 내용이었다. 개미와 곤충뿐만 아니라 작가의 여러 잡상식이 뒤덤벅되어 뜻하지 않았던 읽을 거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다.

이 놈 의외로 박식한 면이 있었군...
뭐 완전 또라이스키는 아니었나...
개미의 사회나 파리 지하철역의 귀뚜라미 같은 항목은 꽤 재밌더라. 그런데 '진시황'에 와서 잠깐 동안 괜찮아졌던 작가에 대한 인상이 한 순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아니 이 놈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중국 역사나 진시황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있는 놈인가.
도대체 이 놈은 어디서 진시황 얘기를 들은 거야? 무슨 야사집 같은 데서?
'믿거나 말거나'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책으로 옮겨 적었나?
진시황 정(政)이 법가 신하들을 모두 죽였다고? 그럼 혼자서 나라를 다스렸단 말인가? 후궁을 모두 죽였다고? 야, 베르베르. 솔직히 말해라. 이 스키 중국 역사책 한 번도 본 적 없지? 그러고도 이런 글을 써서 돈을 벌 생각을 한단 말이냐...

이 시점에서 정말로 궁금해진다. 이런 식의 독자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생각의 원천은 베르베르 개인의 얕음인지, 프랑스인의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면 유럽인의 동양사에 대한 인식의 한계인지. 황제지배체제의 선결요건인 군현제나 그와 동전의 양면인 관료제 등에 대한 깊은 지식은 사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인식은 동양인을 '반지의 제왕'의 오크 정도로 보는 것과 매한가지다. '진시황' 항목에 와서 이제까지 봤던 책의 다른 내용에 대한 생각도 한꺼번에 달라졌다. 귀뚜라미? 이 놈이 정말로 조사를 해 보고 글을 쓴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요네즈? 아는 친구한테 듣고 무작정 쓴 내용인지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기대하고 본 건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베르베르를 업수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타나토노트'에서 받았던 어처구니 없음이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난다. 일개 소설가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가? 근데 독자로서 이 정도는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닌가?

'엔터테인먼트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잭과 콩나무  (0) 2010.03.11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0) 2010.03.10
월드체인징?  (0) 2009.01.05
혁명의 실패  (0) 2008.10.13
중세의 사람들  (0) 2008.03.22
Posted by 도그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