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골드바흐의 추측』 이후 실로 십수 년 만에 읽는 수학소설―물론 이런 장르도 있다면―이다. 이런 소설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심지어 나 몰래 영화까지 나온 걸 보면, 그 영화 어지간히 못 만들었나 보다.

수학을 소재로 한 글은 내게 즐거움과 동시에 약간의 괴로움을 함께 가져다 주는데,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도중에 자꾸 곁길로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소설 초반부터 친화수親和數(우애수友愛數)가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둘러가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다. 이제껏 알려진 가장 작은 친화수인 220과 284가 나왔는데, 다른 친화수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짐과 동시에 그것을 구하는 알고리즘을 머리 속에 그려 보기 시작했다. 우선 주어진 수의 약수를 구해야 하고, 그 약수들의 합을 통해 반대편 수가 만들어지면 그 수의 약수와 그 합을 구해서 원래의 수와 비교하고… 이 정도면 괜찮았는데, 곧이어 1부터 1억까지의 자연수 중에서 소수素數(prime number)의 개수를 구하는 함수를 만들어야 했다. 5761455개가 바로 그 답이라는데, 이걸 그냥 믿으면 되겠나. 직접 구해 봐야지 않겠나. 예전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분명히 C나 파이썬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하더라. 다행히도 그 이후에는 특별히 옆으로 샐 만한 거리가 없었다. 후반부의 오일러의 등식 빼고.

등차수열의 합을 구하는 공식이 등장하는 부분을 읽을 땐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3학년 때가 떠올랐다. 사실 이 공식을 생각하면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10살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등차수열의 합, 정확히 말하면 1부터 10까지의 합을 구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내가 이루어낸 첫번째 수학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 없이 무심히 흘러가던 10살의 어느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때 우리집에 한 서적 외판원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어린이용 학습만화나 백과사전류의 책들을 팔러 다니는 외판원이 많았다.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조기 수학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정열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내게 제시한 문제가 1부터 10까지의 합 간단히 구하기였다. 듣는 순간엔 막막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도전 과제는 한 가지 맹점이 있는데, 도전자로 하여금 "여기엔 반드시 간단한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내가 이 아저씨를 통해서가 아니라 방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주제를 생각해 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박사의 말처럼 답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어려운 법이지, 답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문제는 하나도 어려운 게 없다. 그런 면에서 내가 나름 눈치가 전혀 없진 않았나 보다. 분명히 존재하는 법칙을 이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잠깐 동안 그 수들을 빤히 노려보았더니 역시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1과 10의 합과 2와 9의 합이 같음을 발견한 것이다. 3과 8, 4와 7, 그리고 남은 것은 5와 6 쌍. 정답은 11 × 5 = 55. 짜릿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1부터 100까지의 합도 두렵지 않다. 주어진 수열의 처음과 끝을 더한 값에 수열의 개수를 2로 나눈 값을 곱해 주면 된다. 수열의 개수가 홀수인 경우엔 중앙값을 제외했다가 나중에 따로 더하면 되고. 당연히 주어진 문제를 풀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외판원 아저씨는 "아드님이 참 똑똑하시네요" 라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남기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서야 했지만, 그날 내가 얻은 작은 수학적 성공을 도와주신 그 아저씨가 없었다면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등차수열의 합이 내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삶은 대체 어떤 것일까. 아무리 내가 지금 머리 속으로 그려 본다고 해도 실제로 그 상황 속에 놓이지 않는 이상 박사의 삶을 완전히 공감하긴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메모해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곧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 일어나면 자신이 처한 상황부터 다시 인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즉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부터 맨 처음으로 숙지하면서 하루를 절망 속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게다가 매일 메모가 쌓인다면 일어나서 한숨 한번 쉬고 곧바로 그간의 메모들을 죄다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내게 왜 이런 형벌이 주어졌는지 한탄하기도 바쁜 와중에 그 많은 메모들이 머리 속에 들어오겠으며, 또 그 정보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을까. 그뿐만 아니라 주어지는 정보는 날이 갈수록 불어날텐데 말야.

사실 소설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그리 칭찬해 주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우선 박사와 그의 형수와의 관계가 별로 매끄럽지 않다. 정지한 시간 속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거창한 관계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수가 등장하는 분량은 민망할 정도로 적다. 아님 말고 식으로 감히 넘겨짚자면, 박사와 형수의 이야기가 잘 전개되지 않아, 소설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작가가 그 부분을 통으로 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박사가 사랑한 수식', 즉 오일러의 등식이 주는 임팩트도 좀 부족하다. 소설이 이 수식의 아름다움을 과연 얼마나 제대로 표현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박사가 그 순간 왜 이 수식을 내밀었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강하지 않다. 물론 이 부분이 작자로서도 어려웠을 터인데,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는 순간 독자들의 책 덮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결정적으로 이 책에서 맘에 안 드는 것은, 왜 박사가 유독 아이들에게는 관대하고 친철하고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엔 누가 옆에서 말 거는 것도 싫어하고 밥 먹는 것도 거르는 사람이 파출부의 아이만 나타나면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 헌신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아이에 대한 특별히 좋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박사가 기억하는 것은 파출부에게 열 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다는 정도 아니던가.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좋아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박사가 가진 격려의 힘 때문이다. 수학에 관한 아무리 작은 문제 제기라도, 아무리 사소한 성취라도 절대 놓치는 법 없이 무한히 격려해 주는 박사의 품성, 성급하게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들은 애 키우는 부모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말은 쉽지만 행동하긴 쉽지 않다는 게 여전히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은 몇 번의 이사 중에 잃어버렸다. 일부러 버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아까웠던 기억도 없다. 재밌게 읽었으나 또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소설. 그러나 이 책은 소장하고 싶다. 나중에 다시 읽고 싶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딸이 이 책을 보고 수학에 조금은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부모의 욕심에…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봐도 아동문학은 아닌데 딸에게 읽히는 건 좀 아닌 듯하다. 관심을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고. 정말로 욕심은 욕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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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이러하다.

  1. 원래는 하루키의 1Q84를 읽을 생각이었다.
  2. 그런데 TV로 12월 19일의 선거 결과를 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대갈등이 이번 선거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 지역갈등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나? 전남과 경북의 각 후보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서 혹시 저들은 조지 오웰이 말한 '2분간 증오Two Minutes Hate' 같은 걸 매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하루키로 가기 전에, 오랜만에 1984를 다시 펼쳤다.
  3. 사람은 어느 시점을 지나면 나이가 들수록 디테일이 뭉개지는 것 같다. 분명히 예전에―물론 아주 오래되었지만―읽었던 것이고, 그것도 당시에도 엄청난 충격 속에서 읽었던 소설인데, 전체적인 줄거리와 몇몇 핵심적인 용어 등만 생각나고 다른 건 너무나 생소하다. 내가 정말로 이 글을 읽었던 게 맞나? 혹시 내 기억도 조작된 건가? 전에 봤을 때에도 이런 사건이 있었던가? 내가 예전에 본 건 혹시 축약판 같은 게 아니었을까? 마치 이 소설을 처음 보는 기분이라 기뻐해야 되는 거 맞지?
  4. 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Big Brother를 '대형大兄'으로 번역했었다. 이번에는 원문 그대로 '빅 브라더'로 사용하고 있다. 대형에 익숙한 나로서는 처음에 이 부분이 제일 어색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대형보다는 빅 브라더가 더 적당한 용어가 아닐까 싶다. 대형이라고 하면 뭐랄까 이소룡의 당산대형이나 범죄조직 삼합회 분위기가 물씬 나지 않나? 아무튼 번역을 어떻게 했나 궁금하여 수시로 영문과 대조하다 보니 생각보다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5. 처음엔 작자 오웰의 분신이 윈스턴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 오웰의 분신은 오브라이언이라 할 수 있겠다. 오웰은 오브라이언의 손과 입을 빌어 본인의 얘길 한다. 오브라이언이 '그 책The Book'의 저자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Power is not a means, it is an end. ... The object of persecution is persecution. The object of torture is torture. The object of power is power." 라고 말하는 순간 어느새 오웰이 윈스턴을 심문하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6. 이런 디스토피아 소설을 보면서 마음껏 대상화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요새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사회가 최소한 권위주의의 터널은 벗어났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은 됐는데, 한순간 방심하는 사이 다시 그 터널이 눈앞에 나타난 게 아닐까 걱정되는 사람은 나뿐인가. 그리하여 2012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껏 우울하다.
  7. 원래는 하루키의 1Q84를 읽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루키를 읽었어야 옳았을지 모르겠다. 아니, 하루키를 읽었어도 여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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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너무 긴 하루… 노래를 부를 땐 쉬었다 가야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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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부터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는 「2002년의 시간들」. 생각해 보면 10년 전의 나는 참 어렸다. 아직 신혼 분위기였던 우리 부부. 그땐 두 딸도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고, 새벽 1시에 국수 먹으러 홍대 앞을 쏘다니기도 했다. 월드컵으로 온통 들떠 있는 주변의 세계. 거리에 응원의 물결이 넘쳐나자 한 친구는 이런 게 바로 혁명적인 상황 아니겠냐고, 우린 혁명의 시간을 당겨서 보고 있는 거라고 말했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저 모여 있기만 하면 그게 혁명이란 말인가. 그저 열기로 넘쳐나면 그걸로 가슴이 뛴단 말인가. 아무튼 그땐 그런 얘기들을 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10년 후에도 이 노래를 들으며, 생각해 보면 2012년의 나는 참 어렸다고 할지 모르겠다. 십중팔구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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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FFTA, 정말로 시간 잡아먹는 괴물이렸다. 나도 정신 나간 게지. 아무렴 이걸 꺼내 놓고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더냐.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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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청년층은 희생을 했으나, 노년층은 지금 시점에 봐도 끔찍할 정도로 비겁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들들이 독일군의 기관총 앞에 짚단 쓰러지듯 픽픽 넘어가는 동안에 안전한 곳에서 단호하게 애국을 요구했던 것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中, 조지 오웰)

어떤 배경으로 전쟁이 발발하였건,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건 간에, 전쟁 속에서는 이미 그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도 다 필요없다. 전쟁에 임하는 자의 임무는 오직 생존뿐.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에 보면 우물 속에 갇혀서 죽어가던 노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자기는 이미 죽었다고. 그 이후에 사는 삶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의 참호에서 살아온 병사들은 어떨까. 그들은 이미 지옥을 본 게 아닐까. 이보다 더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순간과 장소가 있을까.

전투 막바지의 억지스러운 "십자가의 고난" 장면이 거슬리긴 하지만,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지옥을 구경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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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기를 신께 빈다. 그런가 하면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육체노동도 있다. ......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훈련을 받는다 한들, 광부는 될 수 없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中, 조지 오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오쇼 라즈니쉬가 쓴 『반야심경』에 보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는 만큼 근심이라.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을 꽤나 만난다. 올 가을에 산 『세계문화전쟁』의 경우도 그러하다. 출판사 비슷한 직장에서 잠깐 일해 본 게 무슨 큰 벼슬이라고 책을 볼 때마다 제본이나 인쇄 같은 것도 신경을 쓰는 폐단이 생긴다는 얘기. (그러고 보니 이놈의 '폐단'도 栗谷의 <萬言封事>를 공부하고 난 이후로 자주 쓰는, 별로 남에게 권장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이다.) 아무튼 『세계문화전쟁』을 보려고 책을 펼쳤다가 기분이 팍 상해서 도로 덮어버렸다. 2도 인쇄는 단도나 4도 인쇄와 달리, 편집자에게 뽑힌 그 색깔이 모든 영광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아주 부담스러운 위치에 있다. 자신 없으면 그냥 4도에서 다른 색에 묻혀갈 일이다.

글 첫머리부터 딴 데로 새 버렸다. 원래 이놈의 인쇄 상태 따위를 얘기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결론은 그래서 『세계문화전쟁』이 미움을 받아 잠깐 쫓겨나고 그 자리를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차지했다는 얘기였는데, 이런 얘길 이렇게 장황하게 하다니... 그런데 『위건 부두...』를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자세를 고쳐잡고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구절이 나온다.

웃기지 못하는 걸로 유명한 개그맨 박수홍이 이제껏 방송에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했지만 딱 한 마디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가난이 제일 무섭다"다는 말. 남들은 다른 게 무서울지 몰라도 박수홍은 가난이 제일 무섭단다. 박수홍이 남들을 웃기려고 한 말인지, 아니면 정말 삶 속에서 우러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에는 웃었고 그 다음엔 충분히 불편했고 그래서 결국은 내 기억 속에 살아남은 말이다. 아마도 박수홍이 방송을 그만둔다 해도 이 말 만큼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갈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농활을 다녀왔을 때 3학년 선배가 나를 상경대 로비에 따로 불러서 앉혀 놓고 커피를 한 잔 뽑아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래, 열흘 동안 고생해 보니 어떤 생각이 드니. 이제 노동의 의미를 알겠니?"

순간 당황했다. 엄청 고생한 것은 확실히 기억에 나는데 노동의 의미까진 솔직히 모르겠더라. 그 대신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앞으로 난 힘 쓰는 일로는 절대로 먹고 살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 힘 쓰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글쎄다.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가 육체노동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도록 흘러간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내 스스로 육체노동이 좋아 그것을 선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입으로는 노동의 신성함, 노동자의 힘, 노동자의 역사적 책무 운운하지만 막상 그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일이 되는 순간 고달픈 건 마찬가지겠지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에는 책 몇 권 읽어서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 선배가 내게 말한 노동의 의미라는 게 혹시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불편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희석되어 갔다. 한 학번 선배들까지만 해도 노동운동 현장으로 들어가야 되는 걸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앞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 두려워서 떠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이러저러한 반성(난 반성도 하지 않았는데!)들이 난무하고, 그 이후 몇 해가 가지 않아서 굳이 노동운동의 길을 걷지 않아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고, 스스로도 불편하지 않는 세상이 와 버렸다. 비록 대기업에 들어가서 돈 많이 벌진 않더라도, 그래도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애들 낳아서 크는 모습 보면서 충분히 살 수 있는 정신노동의 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차마 조지 오웰처럼 육체노동자가 될 일이 없기를 드러내놓고 신께 빌 수는 없었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신노동의 길을 택한 거지, 노동 계급과 가까워질 생각은 손톱 만큼도 없다고 차마 말 할 수는 없었다. 몇 년 동안 놀고 먹다가 다시 내 손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왔어도, 비록 말은 공공근로라도 해야겠다고 했지만, 육체노동이 내 몫이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오웰의 이 책은 이제 앞 부분의 몇 장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불편하다. 또 한편으로 불편하기 때문에 읽어야 할 것 같다.

이제사 하는 말이지만, 나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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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잘 치는 사람들 보면 부러운 것과 같은 크기로 글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솔직히 말해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략하지 않나 싶은 글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다음 그렇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글 속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은, 아니 그 속에서 독자가 듣고 싶은 말들은 다 건졌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 잘 짜여진 작은 프로그램 소스를 본 느낌이다.

띠동갑 작가와 독자. 글 속의 작가의 말들이 온전히 자기 속에서 길어올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세계로부터 얻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새파랗게 젊은 작가의 언어를 통해 독자가 작은 크기이나마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이 원래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관계 없이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

내가 이 글을 썼다면 이 작가처럼 멋지게, 그리고 괜히 복잡하게 얽지 않고서 현실과 환상의 거리를 적당하게 유지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을 적당하게 양보하게 하고 마지막에 화해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현실과 환상 중에서 어느 하나의 완전한 승리와 다른 하나의 패배를, 그리하여 파국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이 젊은 작가가 조금, 아주 조금(!) 부럽다. 많이 부럽지 않은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난 퍼즐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푸는 사람이므로, 만들어내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몫이므로...

작가 같은 직업을 갖지 않은 걸 정말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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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정치적이고 목구멍까지 쌉싸름한 맥주 이야기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열기가 무르익을 무렵 화제가 되었던 소식 중 하나가 치킨집과 피잣집의 매출 증가와 함께 이들 음식의 감초격인 맥주 소비의 증가였다. 이처럼 맥주는 전통 술인 막걸리, 소주를 제치고 가장 친숙한 대중주가 되었다. 이제 맥주는 우리 삶의 벗인 것이다.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맥주, 세상을 들이켜다》는, 전 세계인이 함께 마시는 술이 된 맥주의 모든 것을 다룬다. 맥주는 유사 이래 세계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급료로 쓰였으며, 중세 수도원의 생활 양식이자 중요한 자금줄이었다. 근대의 맥주는 노동자와 인텔리 간 소통의 장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금주령으로 맞서기도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반전 연설을 한 곳이 뮌헨 킨들 홀이라는 맥줏집이었고, 나치스가 창당대회를 연 곳은 뮌헨의 슈테르네커브로이라는 맥줏집이었으며 이곳에서 히틀러는 최초의 정치 연설을 한다.
이 책의 저자 야콥 블루메가 “맥주는 사회와 정치를 떠받드는 강력한 요소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맥주는 공동체의 술이며, 연대의 술이다.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맥주는 쉽게 취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함께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적절한 술이며, 소통의 장을 마련해 공동체의 기초를 튼튼히 해준다. 이처럼 맥주는 역사 속에서 주연은 아닐지 몰라도 주연의 손에 늘 들려 있던 중요한 조연이었다.

...

술을 거의 못하는 내가 그나마 즐기는 술이라고는 맥주. 요샌 막걸리가 대세라지만 20대 초반에 처음 술을 배울 때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그 전날 먹었던 것까지 다 게워내는 경험을 몇 번 한 이후로는 도저히 막걸리를 입에 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러니 소주는 말할 것도 없다. 갈수록 소주도 약해진다고 하는데 내가 먹어보니 그게 그거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본의 아니게 비싼 술, 즉 백세주나 산사춘 같은 술, 섞어 봐야 오십세주 같은 걸 먹는 정도일까. 와인은 어쩌다가 입에 맛는 걸 먹어보긴 하는데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그 술을 먹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와인은 품질과 맛이 왜 그렇게 천차만별인지... 그래서 내 술은 맥주다. 맥주 입장에서는 별로 친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이 책은 알라딘에 다른 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보고 덜컥 샀다. 맥주에 관한 얘기라잖은가. 소주가 세상을 말아먹든, 막걸리가 세상을 다 덮어버리든 내 알 바 아니다. 물론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므로 내게 익숙한 하이트, 카스, MAX 같은 이름이 안 나온다는 게 좀 아쉽다.

지은이는 야콥 블루메[Jacob Blume]라는 사람인데 1961년생이다. 젊다. 예술사와 문학사를 전공했다는데 이 책은 역사책이라고 쓴 건가? 역사의 본질이 문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해마지 않지만, 그렇다고 역사와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같은 위상을 가지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책을 술술 읽히도록 재밌게 쓰는 것은 분명 칭찬받을 만한 지은이의 능력이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지은이의 상상력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개입된다는 점은 분명 지적받아야 마땅하다. 읽는이가 설마 맥주에 관한 수필집을 기대하고 이 책을 사리라고 본 건가?

아직 절반도 못 읽은 시점에서 책 전반에 대한 품평을 하긴 좀 이르다. 마저 읽은 다음에 본격적인 난도질을 해도 늦지 않을 터.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냉장고 남은 술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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