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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7 현장검증에 어울리는 말...
  2. 2008.02.17 아빠는 어디에
  3. 2006.05.08 수식어는 주어의 천적
  4. 2006.05.08 오프라인
  5. 2006.05.02 수학 비타민
  6. 2006.05.02 한 시간 일찍...
  7. 2006.05.01 아주아주 긴 이름
  8. 2006.05.01 가장 힘든 한 주
  9. 2006.04.25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여행
  10. 2006.04.24 동물성 단백질
    대학 때 대본소에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리를 소재로 한 박원빈의 만화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요새도 만화 그리는지는 모르지만 한때 하드보일드 깍두기 만화로 유명했던 그 박원빈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만화 자체도 그다지 감명 깊을 리 없는고로 전체 줄거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머릿속에 한 장면이 뚜렷이 남아있다. 공간적 배경과 주인공은 박원빈 류의 만화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일본과 제일동포다.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요리사 세계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제일동포의 삶을 그린 만화였던가. 아무튼 주인공은 일본 최고의 요리사인 일본인 스승 밑에 들어가서 테스트 과정을 거치고, 그 밑에서--박원빈 만화가 늘 그렇듯이--주인공만 없었으면 멀쩡히 행복한 삶을 누렸을 일본인 라이벌과 경쟁하며 요리 수업을 받는다.

    어느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각자 제일 자신 있는 일품요리 하나씩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이 때 우리의 주인공이 만든 것이 잉어탕인데, 그 때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조밥을 지어 잉어탕과 함께 내놓았다. 스승이 왜 쌀밥이 아닌 조밥을 지었냐고 묻자, '그냥 잉어탕에는 조밥이 어울릴 것 같아서 지어보았습니다.'라고 말한 주인공. 스승의 입에서 감탄과 함께 칭찬의 말이 쏟아졌다. '역시 자네는 천재야 천재. 잉어탕에는 조밥이 제격이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아도 감으로 알아내다니...' 역시 결론은 주인공이 하늘이 내린 잘난 놈이라는 거다.

    아니,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글이 이렇게 옆길로 샜는지...
그렇다. 잉어탕에 조밥이 어울리는 것처럼, 즉 요리에도 궁합이 있는 것처럼, 특정 사건에도 자주 쓰이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요사이 현장검증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주 생소한 말은 아니지만, 2008년 들어 근자에 흉흉한 사건들이 많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빈도가 올라갔으리라. 그런데 TV나 신문에 현장검증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거의 반드시, 마치 바늘 가는 데에 실 가듯 따라오는 말이 있는데 바로 '태연히'라는 말이다.
현장검증에서 피의자 OO씨는 태연히 범행 과정을 재연하였습니다.
피의자 OO씨는 태연히 범행 과정을 재연한 뒤에...
모자에다 마스크를 쓴 OO씨는 범행 일체를 태연하게 재연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말은 아마도 '담담하게', 또는 '묵묵히'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아마도 시청자나 독자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에 이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파렴치한 범인--엄밀히 말하면 피의자 또는 용의자--이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범행을 재연하였다는 얘길 들으면, 누가 분노에 떨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좀 그렇다. 아니, 현장검증을 태연하게 하지 않으면 대체 사람들은 범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그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통곡이라도 하라는 걸까. 현장검증은 이미 범행의 순간이 아니다. 범인이 체포되어 조사 받는 과정에서 이미 몇 번은 되풀이하여 얘기한 것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범행 순간의 긴박함이 있다면 몰라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범인들이 현장검증시에 보일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수사에 대한 협조와 이후 공판 결과의 함수관계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을까.

    사실 현재의 현장검증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행 검증 방식은 사건이 벌어진 곳의 주민들이 주욱 둘러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게 과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인가. 물론 여기서 피의자의 인권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현행 방식은 마치 북한의 공개 즉결처분과 같은 분위기 아닌가. 어차피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을텐데 꼭 그렇게 한 장소에 다같이 모여서 분노를 표출해야만 하는 걸까. 마치 ritual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도 답답한 일이지만...

    태연한 현장검증,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아니면 기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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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어디에

뷰파인더 2008. 2. 17. 14:08
    장화홍련, 콩쥐팥쥐,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 신데렐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화 속에는 아빠가 없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이제 망할 놈의 아빠가 숨어버린 또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딸 키우는 입장에서 숭례문 방화사건보다 몇 배는 더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울산의 영진군 실종 사건이다. 어이없게도 아이를 죽인 범인은 실종 신고를 한 계모였다. TV속에서 아이를 찾아달라고 울먹이던 모습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또한 체포된 후에는 기껏 한다는 말이 '때려서 미안하다', '죽을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때렸을 뿐이다' 등으로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인간으로 저럴 수 있을까...

    근데 며칠 동안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나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사건 당일 돈 벌러 집을 비워서 알리바이가 확실하다는 그 아빠라는 작자에 대해 경찰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설마 영진군의 아빠라는 사람이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평소 동네 주민들과 유치원의 교사도 다 알고 있었다는 계모의 폭력을 아빠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될까? 그냥 자식이라고 싸질러 놓으면 그게 아빠의 소임을 다한 것인가? 이건 무관심한 아빠 정도가 아니라 최소한 이 사건의 공범이라과 봐야 옳다.

    드디어 영진군의 생모까지 나와 울부짖는 마당에도 이놈의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최소한 그놈의 심경이라도 물어봐줘야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을 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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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동안 Walter Moers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보고 있다. 집에서 진득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번에 깨달았다. 책을 펴들자마자 바로 내용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앞에 읽었던 부분도 다시 확인하고 끊어졌던 상상력을 최대한 이어서 다시 시작할라 치면 어김없이 딸이 무슨 일인가를 만들어낸다. 아무튼 이런 악조건(?) 속에서 오랜만에 소설을 보고 있는데...

책과 문학을 소재로 한 판타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용과 오르크, 늑대 등이 나오는 판타지는 이제 너무 많지 않은가. 아참, 여기도 용은 아니지만 공룡은 나온다. 주인공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고향 린드부름 요새의 주민은 문학을 사랑하는 공룡이며, 미텐메츠도 아직 출판한 책은 한 권도 없지만 시인을 지향하는 공룡이다. 절대 싸움 잘하는 족속은 아니니 실망하지 않길 바란다. 판타지 문학이 대개 그러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인 차모니아도 꽤나 매력적이다. 사실 이 소설의 주무대인 부흐하임(책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이라는 도시는 책과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로망의 도시이지만, 또한 출판산업의 추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음~ 본의 아니게 글이 책 소개로 흐르는 듯하여, 소설 내용은 여기까지. 이 책에서 재밌는 것은 차모니아 문학가들이 만든 책의 제목이다. 몇 가지를 인용하자면, 『털양말을 신은 호랑이』, 『면도를 한 혀』,『삶은 신선한 돼지고기 속의 생쥐 호텔』, 『오직 어제만 짖는 개』, 『나의 순간들은 너희의 머리카락보다 길다』, 『상처 입은 고마움』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그 내용이 궁금해지는 책의 제목은 『비웃음을 안 당한 우스운 케이크』인데 유머의 거장 아네크도치온 페카의 전설적이고 희극적인 인생사를 다룬 책이란다. 제목만으로도 나의 상상력이 자극이 된다. 이러한 제목의 책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

책을 사랑하는 외눈박이 괴물 부흐링(책 마니아라는 뜻이다)족이 주인공에게 조언하는 말들도 인상적이다.
수식어는 주어의 천적입니다.
괴기소설은 목덜미에 차가운 행주를 걸친 채 쓰는 것이 가장 좋아요.
한 명의 시인이 표절하면 절도이지만, 많은 시인들이 표절하면 그것은 탐구입니다.
두꺼운 책들은 지은이가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두꺼워진 겁니다.
소설 내용을 떠나서 이런 뜻하지 않은 언어 유희가 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어제는 이 소설의 저자가 만들었다는 '차모니아 야간학교'라는 사이트를 보기 위해 독일어를 공부할까 하는 미친 생각도 잠깐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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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롤플레잉 2006. 5. 8. 11:09
지난주 화요일부터 정말로 필요한 일 외엔 컴퓨터를 켜지 않고 지내 보았다. 처음엔 목요일에 겹친 발표 수업과 마지막 시험 때문이었다. 하나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하루에 몰리다니. 아무래도 운이 없는 것인가. 목요일 당일엔 집에 오니 너무나 피곤해서 TV 앞에서 널부러져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사흘 연휴가 다가왔는데, 이렇게 며칠 컴퓨터 없이도, 범위를 좀 더 좁히자면 오프라인으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더라...

온라인이라는 게 생각해 보면 담배와 같다. 습관이 되면 할 때의 효용보다는 끊을 때의 금단증상이 괴로운 것이다. 일어나자 마자 습관적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올리고 브라우저를 켜지만 딱히 무슨 일이 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아무 것도 못하고 하루가 가 버린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그대로고, 꼭 봐야겠다고 벼르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그냥 지나가고, 그렇다고 그 시간 동안 딸이랑 놀아준 것도 아니고...

명절에 고향을 며칠 다녀올 때 며칠간 오프라인으로 살게 된다. 첫날은 꽤나 힘들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오히려 몸이 가뿐해진다. 담배도 아닌데 끊는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이렇게 좋아진다는 게 참 우습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온라인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내 몸은 어떤 의미에서 충전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프라인으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올 때까진 좋은데, 현관을 들어서면서 컴퓨터를 보게 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예전에 담배를 물듯이, 전원을 올리고야 마는 것이다. 물론 아내의 구박이 항상 따른다. 집에 오자마자 또 컴퓨터냐고...

그리하여 이번 연휴엔 의식적으로 컴퓨터를 옆에 두고도 그냥 살아 보았다. 금연에도 껌이나 사탕 같은 보조제가 필요하듯이, 이번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사흘 동안 충분하진 않지만 딸이랑 놀아주기도 했고, 책도 보고, TV도 짬짬이 보고, 잠도 충분히 자면서 심지어 설거지까지 했다. 게다가 월요일에 별로 피곤하지도 않다. 덤으로 아내의 약간은 의외라는 투의 칭찬도 들었다.

딱 끊고 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앞으로는 온라인 이거 조절 좀 하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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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 예스24의 수학 관련 도서 목록에서 판매량 1위에 올라 있는 책이 '수학 비타민'이다.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수학 원리를 재미있고 쉽게 보여준다고 한다. 학생부터 일반인까지 심지어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데...

결론부터 말해서 남들 많이 사용하는 카드가 좋은 카드라는 LG카드 광고, 그거 말짱 거짓말이다. 남들 많이 본다고 좋은 책 아니라는 거 이번에 제대로 알아버렸다. 물론 난이도 하나는 정말 낮추어 놓긴 했다. 수학 전혀 모르는 사람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문제는 그 내용이 나같은 사람의 흥미는 끌 수가 없다는 거다. 수학 관련 책을 이렇게 속독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을지는 미처 몰랐다. 게다가 그렇게 건성으로 읽으면서도 별로 아쉽지 않더라는 거다. 몰라도 되고 별로 궁금해지지도 않는 (실은 수학을 몰라도 어디서 한 번은 이미 들어 본) 내용이,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이나 구성 같은 전 전혀 고려되지 않은 듯 무심하게 나열되어 있다. 수학 하면 두드러기 나는 사람들의 꽤나 의식한 듯 아주 다양한 소재를 건드리면서도 절대(!) 깊이 접근하는 법이 없다.

이런 책 사서 봤으면 어쩔 뻔 했냐... 다시는 판매량에 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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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까지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늦어도 6시50분에는 나서야 한다. 오늘따라 눈이 안 떠지는 걸 억지로 부벼가며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한 시간 일찍 자야겠다. 이래선 6월 방학까지 어디 버틸 수 있겠나.

아침엔 꼭 죽을 것 같더니 그래도 어찌어찌 통학버스에 몸을 실은 것까진 좋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오늘은 11시까지 가는 날이었던 것이다. 아우~ 빌어먹을...

예전 같으면 한 시간 일찍 하루를 시작하였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네버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일진이 제발 이 정도 선에서 바닥을 찍어줘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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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유머일번지'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던 고전 코미디 소재의 하나가 바로 '김 수한무(金 壽限無)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손이 귀한 집에 어렵사리 얻은 자식이라 장수하라는 뜻에서 거창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름을 줄여서 부르면 장수 효과가 사라진다는 작명가의 말 때문에, 물에 빠진 아들을 이름만 부르다가 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반 친구들이 저 긴 이름을 굳이 공책에 적어주었다. 마치 시험이라도 볼 것처럼 모두들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암기했다. 당연히 성적이랑은 관계 없었고, 저런 거 잘 외운다고 머리가 좋아진다는 보고도 들은 바 없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읽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맘먹고 있던 참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아마추어의 잡설로 만들어 버린다는, 이슬람 아니 인류 최고의 여행 문학이라는 수식을 항상 달고 다니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 이븐 바투타는 중세의 세계적 대여행가이며 탐험가다. 그가 3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을 오가며 보고 들은 것을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원제는 좀 긴데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 보록(寶錄)'이라는 다소 따분한 제목이다. 저자가 메카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길 떠난 김에 이슬람 세계 곳곳을 돌아보고 싶어 3대륙을 30년에 걸쳐 돌아다녔다. 또라이짓도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강한 인상을 남기는 법이다. 방랑길 27년째 되던 해 드디어 술탄 아부 아난의 눈에 들어, 술탄의 후원 아래 여행을 마치고 여행기를 쓴 것이다.

그런데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소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건 어느 정도 봐 줄만 한데 아랍인들의 이름은 정말 살인적이다. 저자인 이븐 바투타만 해도 그렇다. 이 사람의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압둘라 븐 무함마드 븐 이브라힘 알 라와티'다. 욕이 안 나오면 비정상이다. 여행기 전체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름이 이러하다. 잠깐 인용을 하자면,

... 한사람은 투니쓰 시의 혼인전담법관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아비 바크르 븐 알리 븐 이브라힘 앗 나프자위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건한 샤이흐이자 마흐디야 해안의 한 농촌 출신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후싸인 븐 압둘라 알 까르시야 앗 자비디야인데, ...

내가 입성했을 때의 튀니지 쑬퇀은 쑬퇀 아부 야하이 이븐 쑬퇀 아부 지크리야 야하이 이븐 쑬퇀 아부 이쓰하끄 이브라임 이븐 쑬퇀 아부 지크리야 야하이 븐 압둘 와히드 븐 아부 하프쓰--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였다.
숨찬다. 대체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열흘 기한으로 대출한 책인데 아무래도 몇 장 못보고 반납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 이름에서 걸리다니...

제발 알라의 은총으로 이 동네 사람들 물에 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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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가장 힘든 한 주를 보냈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시작한 좌절은 시험 당일 그 절정을 맞았다. 어떻게 10분 전에 암기한 내용도 못쓴단 말인가. 하긴 뭐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한 주 내내 노트를 끼고 살았지만 여전히 머리 속에 남지 않는다. 아무래도 지리학은 내게 안 맞는 과목인가 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지리학의 내용은 들을 때는 알아도 내 것으로 남지는 않았다.

들인 노력에 비해 형편 없는 시험을 치르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오뉴월에 감기가 찾아왔다. 주말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 이젠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두통이건만 이럴 때 아프면 괜히 더 억울하다.

게다가 이 한 주를 더 절망적으로 몰고 간 주인공은 바로 딸이다. 한 주 내내, 그것도 굉장히 심각하게 아팠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렸는데 병원에서도 딱히 방법은 없나 보다. 그냥 해열제를 처방해 주면서, 금방 내릴 열은 아니란다. 어금니가 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란다. 거기에다 감기까지... 그럼 애타는 부모는 어쩌란 말이냐. 온몸에 열꽃이 오르고 설사를 해댄다. 설사 때문에 엉덩이가 짓물러 더 아프다. 이렇게 주말 내내 딸은 아파서 울고 엄마 아빠는 그걸 보며 안타깝고 지치고 나중엔 화가 났다.

새달의 첫날이 밝았지만 상황은 아직 지난주에 비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딸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고, 엄마는 지난 한 주 동안 완전히 지쳤고, 아빠는 여전히 시험과 레포트와 발표 수업이 이번 주 내내 꽉 차있다. 새로운 한 달, 새로운 한 주가 아니라 지난 달, 지난 주의 연속일 뿐이다. 기분도 황사처럼 부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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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터키에 필 받은 참에 보고 있는 책이 바로 『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이다. 프랑스의 전직 기자 할아버지가 은퇴 후 실크로드를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로지 두 다리로 걸어 횡단하며 쓴 기행문이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역사가 주(周)나라 무왕(武王)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의 도시 서안(西安)에 이르는 12,000km의 긴 여정이다. 이 노인네 할 말도 많았는지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무려 세 권이나 써냈다.

이제 막 몇 장을 읽은고로 아직 전체적으로 이 책이 어떻다 말할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하나 찾았다. 저자의 서문 대신 편집자가 책의 앞부분에 글을 하나 써 놓았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여행」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거창한 내용은 아니고, 저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얘기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이 정말 멋지다. 글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편집자의 문체가 근래에 보기 드문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멋지게 쓴단 말인가.

혹시 이 멋진 문장력의 소유자는 편집자가 아니라 번역자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본문을 몇 장 읽어본 바에 의하면 절대 번역자의 솜씨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도 글솜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탄할 정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저자가 자신이 여행하며 보고 느낀 점을 구술하고, 편집자가 글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다. 하긴 간접 경험이라면 아무래도 살아있는 글이 되진 못할지도...

이 편집자는 혹시 작가로 나설 생각 없나 모르겠다. 이런 짧은 글 하나가 잠시나마 세상을 밝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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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성 단백질

롤플레잉 2006. 4. 24. 11:22
오늘 아침 버스를 타고 학교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고기가 땡기기 시작했다. 온통 머리 속은 두 글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고기 고기 고기 고기 고기... 라디오의 뉴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음 정차할 곳이 어디라는 방송도 들리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고기에 대한 그리움이 어떤 계기에 의해 불붙어버린 것인가. 내 몸에 고기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어온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기생충들의 시위인가.

근래 동물성 단백질이 부족한가. 그렇지도 않다. 끼니때마다는 아니지만 생선도 많이 먹고, 처가에서 먹는 저녁상에는 고기 반찬도 많다. 그런데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요즈음 먹는 것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긴 하다. 학교 식당이 아주 테러블한 것이다. 맛이 없는 수준을 넘어 구역질까지 나려 한다. 밥투정 안 하기로 소문난 나로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다. 이 맛없는 식사를 4년을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학교 밖으로 나가자니 시간도 부족하고 비용도 만만찮다. 아 우울한 봄날...

한때는 모든 것을 동물성 단백질로 환원시키는 마빈 해리스가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은 그 양반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 당장은 그 무엇도 아닌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다.

오늘 저녁 S랑 삼겹살 먹자는 약속을 잡았다. 근데 시간이 왜 이리 안 가는 거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해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참 M이랑 T도 시간 나면 좋을텐데. 말 나온 김에 수기 아저씨도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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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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