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다.

원래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 외엔 뭐든 하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 아닌가. 예전에는 주로 책을 보고 싶었다. 꼭 공부 못하는 인간들이 시험기간에 다른 책을 찾는 것 같다. 참 이상한 것이, 시험칠 과목의 책만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그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까지... 그래서 시험기간만 되면 '오늘의 책'이나 학교 구내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기어이 몇 권을 손에 쥐고 돌아오기도 했다. 물론 시험이 끝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법은 풀리고 사 놓았던 책은 그대로 책장에서 썩는 법이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선 아무래도 책보다는 게임이 주류가 되었다. 꼭 마감 시간 받아 놓고선 게임 CD를 만지작거린다. 새 게임을 받아서 설치도 해 보고, 예전에 하던 게임도 한 번씩 점검해 준다. 요 한판만 끝내고 일을 시작하리라 다짐하지만 어느새 한판이 열판이 되고 새벽 세시를 넘겨서야 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울면서 일을 시작한다.

원래는 여행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등산의 경우도 산을 올라가지 않고 밑에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는 나로선, 굳이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멀리 떠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다. 여행이 주는 재미보다는 고생스러움이 먼저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여름 피서철에 멀리 움직이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렇잖아도 날도 더워 짜증스러운데 사람들 바글대는 곳에 비싼 돈 줘가며 찾아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여름 휴가는 방콕행이다. 국내 여행도 이러할진데 해외 여행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해외 여행이라곤 신혼여행이 전부다. 게다가 그것도 함께 간 사람 때문에 즐거운 여행이지, 사실 돌이켜 보면 그다지 알찬 여행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태국 문화에 깊이 감명 받은 것도 아니고, 먹거리를 제대로 섭렵하고 온 것도 아니고, 기암절경에 넋을 놓은 것도 아니다.

요즘은 이상하게 여행을 가고 싶다. 그것도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예외적으로 예전부터 몽골의 고비사막엔 꼭 가보고 싶은 맘이 있었지만, 그것은 내 인생에 언젠가 한 번은 가 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일 뿐이었다. 언제 어떻게 가리라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해외 여행을 꿈꾸는 지금도 그 행선지에 몽골은 들어가 있지 않다. 또한 서유럽이나 미주는 단호하게 제외된다. 도무지 걔네들이 사는 모습은 궁금해지지가 않는다. 최근 내 관심을 끄는 곳은 동유럽이나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이 엄중한 시험기간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곳은 터키다. 이스탄불에서 누가 날 초청한 것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왜 그곳인지는 모르겠다. 이제 곧 여름이 되면 시원한 알프스가 생각날 법도 하건만, 날도 더운 지중해에 왜 가고 싶은 건지. 혹시 얼마전 다시 잡았던 '대항해시대'의 영향인가...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여행사 사이트도 기웃거려 보았다. 비용이 턱없이 많이 든다. 패키지로 가야 할지, 배낭여행 형식으로 가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딸은 대체 어디다 맡긴단 말인가. 아니 맡길 곳이 있어도 그렇다. 장기간 부모랑 떨어져 있는 게 어린 딸에게 좋을 것 같지 않다. 아무튼 나를 둘러싼 객관적인 상황으로 본다면 여행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놈의 시험기간이 주는 특수한 상황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터무니 없는 바람을 갖거나 공상을 하도록 만든다.

그래... 막상 실제로 출발하려 하면 역시 귀찮을지 모른다. 역시 이 모든 책임은 시험이 져야 한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힘든 한 주  (0) 2006.05.01
동물성 단백질  (0) 2006.04.24
휴전선, 환율  (0) 2006.04.20
뇌의 신비  (0) 2006.04.17
역시 자율이 어렵다  (0) 2006.04.13
Posted by 도그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