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책 2006. 2. 21. 12:42

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朝光, 1936.3

'운문은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 이라는 말이 있다. 정지용 자신이 한 이 말은, 그만큼 운문에 자신있음을 표현하는 자화자찬이겠으나, 난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마도 정지용이 김기림을 의식하고 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직 한국문학에서 그와 같이 운문과 산문을 두루 잘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1988년 김기림의 작품이 해금되고 난 후 92년에 '길' 이라는 제목으로 시와 수필, 시론이 한 데 묶여 출간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이었던 92년에 이 모더니즘의 대표적 문인의 글이 나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든 한 권의 책으로 한동안 나는 모더니즘의 바다에 풍덩 빠져 지낸 적이 있다. 그의 시 '관념결별', '관북기행', '희망' 등이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에 날려갈 것만 같았던 내게 자그마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곤 했던 글이다.

그의 수필 '길'은 산문과 운문의 구문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는 그 맛 때문에 10년이 넘게 씹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라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저런 표현은 감탄을 넘어 배가 아플 정도다.

아직도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 --- not strengthening but lecture!)'와 함께 가장 아끼는 이 책을 오늘 책장을 정리하다가 다시 만났다. 한참을 잊고 있다가도 여전히 이렇게 반가운 것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빈곤한 역사주의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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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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