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쓸 논문에 필요할까 하여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다. 책을 고를 때 최소한 머리말이라도 읽어 봐야 하거늘 목차만 보고 골랐더니 역시 이런 쓰레기를 건지게 된다. 집에서 와서 출판사를 보니 역시 살림에 일말의 보탬이 된 책이라고는 낸 적이 없는 '살림'이다.
대학 동기 T와 이름이 한 끝 차이 나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이 패망한 것이 왕권보다 신권이 강했기 때문이란다. 얼핏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신권을 누르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과감한 개혁가들이었다'는 말을 보는 순간,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이런 생각이 딱 든다.
왕권 강화가 개혁이란 말인가. 갑자기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수준으로 역사가 퇴행하는 순간이다. 왕에게 권력이 가면 선善이고 신하에게 권력이가면 악惡이라는 이런 순진하고 철부지같은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오나. 선조가 조선 왕조사에서 다섯 명만 받았던 조祖의 묘호를 받았던 명군이란다. 조祖의 호를 받으면 명군名君이라고? 이 사람 역사 시간에 졸았나? 그럼 인조는 무슨 명목의 명군이란 말인가. 인조가 부국강병과 무슨 관련이 있나.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이 설마 조선 백성의 생존을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싶은가.
머리말까지만 읽고 책을 덮으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문까지 가보자 싶어 한 번 읽어 봤더니 역시나다. 제발 역사적 사실에 무지하면 역사 관련 책은 쓰지 말자. 그게 독자들에 대한 도리 아닌가. 대체 18,000원이나 하는 책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단 말인가. 무려 600 페이지 가까운 분량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혹시 왕정복고를 꿈꾸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박정희식의 철권 대통령제를 말하고 싶은가. 저자 당신이 보기에 조선이 당파싸움으로 망했다면 대한민국도 민주주의 때문에 망할 거라는 거 아닌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책값이 만만찮은 관계로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볼 것 같지는 않다. 역시 도서관이라는 시설은 좋다. 이런 책 사서 안 봐도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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