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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31 체하다
  2. 2008.12.31 2008년
  3. 2008.11.25 공과금 1
  4. 2008.11.23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5. 2008.09.01 2학기 첫날 2
  6. 2008.08.27 검진과 처방은 달라요
  7. 2008.08.16 올여름에 맺힌 것들
  8. 2008.08.12 사람이 우습게 보일 때
  9. 2008.04.19 길을 걷는 다섯 사람
  10. 2008.04.07 술버릇 2

체하다

롤플레잉 2009. 1. 31. 07:55

    아침 먹을 때 그다지 입맛이 있지 않다는 정도였지만 체한 줄은 몰랐다. 평소 잘 체하지 않는 편인데다가, 사실 정오가 지나서도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오전 10시 영업 시작하자 마자 장을 보러 간 이마트에서 1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 혼났다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쇼핑 카트를 밀고 가면서도 대체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아니 실은 눈을 뜰 수 없는 것 때문에 잠이 온다고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장을 봐서 집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체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심지어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12시면 점심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다 싶어서 한 시간 후에 밥을 먹기로 했는데, 아까부터 무겁게 떨어지는 눈꺼풀을 주체할 길이 없어 잠깐 누워야지 하는 생각으로 쓰러졌다. 꿈도 꾸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벌써 오후 2시. 침실에서 제대로 자리 펴고 누운 게 아니라 거실에서 무계획적으로 청한 잠이라, 베개 대신 쿠션을 베고 잤더니 뒷목이 거의 마비가 될 정도로 아팠다. 세상에 이런 영양가 없는 낮잠이 있다니... 게다가 나로 말하면야 원래 낮잠에 두통이 따르지 않던가. 그런데 뭔가 심상치가 않다. 낮잠 후의 두통 치고는 너무 심하게 머리가 아파온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두통. 낭패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두통약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빈 속에 먹기는 아무래도 속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낮잠 전에 정한 점심 메뉴인 자장면을 먼저 시켜 먹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몸 상태가 흔들렸다. 몸이 아프긴 아픈데,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좀 모호하게 아파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 두통, 그 중에서도 전두통(前頭痛)과 메스꺼움. 그런데 이 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온 몸을 관통했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토할지 몰라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아내가 묻는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잘 모르겠어."
"토할 것 같아?"
"응. 근데 막상 하려고 하니 또 안 나오네."
"낮잠 잤더니 머리 아픈 건가?"
"머리도 아프긴 한데,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워. 온 몸이 이상해."
"밥 먹을 수 있겠어?"
"두통약 때문에라도 다 먹어야지."

    메스꺼움을 참아가며 결국 자장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리고는 식후 30분 시간 맞춰서 두통약을 입에 넣고 물을 들이키는 순간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약 먹은 보람도 없이 바로 화장실로 뛰어가서 다 게워 냈다. 머리는 머리대로 뽀개질 듯이 아프고, 속은 속대로 다 뒤집어지는 고통... 올 겨울 크게 아픈 것 없이 넘어간다 싶어 내심 좋아했었는데, 명절 연휴 끝나고 감기 몸살로 한 이틀 고생하더니, 연이어 체하기까지...

    어릴 적에도 체했을 때 이렇게까지 머리가 아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체증에 두통이 따라오는지는 이번에 여러 곳을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편두통은 알아도 전두통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역시 이번 일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머리와 배를 위시하여 온몸이 어찌나 아픈지 거의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끙끙 앓았다. 아내는 옆에서 안절부절이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몰라.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체한 거 맞지?"
"그것도 몰라."
"체하면 머리도 아프대."
"그런가. 암튼 너무너무 아프다."

    자주 체하진 않지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에 대해선 병적인 공포감을 느끼는 편이다. 토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할까. 미처 화장실까지 가지 못하고 이불이나 방 바닥에 토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실제로 어릴 때나 대학 들어와서 술 먹고 몇 번 그런 경우가 있었다. 토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그 와중에 직접 방을 치워야 하거나 또는 누군가에게 그런 수고를 하도록 짐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이 참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아파도 제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다. 약간이라도 속에서 어떤 반응이 오면 지금 일어나야 늦지 않게 화장실로 달려갈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과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서로 겹쳐서 몸도 마음도 모두 괴로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몇 번에 걸쳐 방과 화장실을 오가며 난리를 쳤다. 결국 아침에 먹은 콩나물을 하나도 소화되지 않는 채로 다 게워 내고서야 아침부터 체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디어 몸이 탈진하여 방에 쓰러지고 나서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두어 시간 잤더니 한 고비 넘어갔다. 저녁에 아내가 사온 약을 먹고 나서야 겨우 속은 진정되는 것 같았는데, 여전히 한 번 아프기 시작한 머리는 나을 기미가 없다. 두통약을 먹었더니 오히려 속만 쓰리고 머리는 별로 차도가 없다.

    어찌 되었건 간에 낮에 너무나 많은 낮잠을 잔 터라 밤에 잠이 올 리가 없는데다가 두통까지 도와주니(?) 또 이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대체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한 번 아프면 연쇄적으로 생활의 리듬이 무너진다. 먹는 거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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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롤플레잉 2008. 12. 31. 23:32
다사다난이라는 한 마디 말로는 절대 표현하지 못할 한 해.
마누라랑 딸내미 없었으면 무슨 낙으로 살았으랴...

내년 봄에 만날 둘째 생각으로 또 한 해를 맞으며...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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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금

롤플레잉 2008. 11. 25. 18:14
학교 우체국에 공과금을 내러 갔다. 월말이 며칠 남은지라 한산하기 그지 없는 우체국. 계산기를 두드려 금액을 맞춰 창구에 내려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렸다.
"공과금 처리 시간은 이미 끝났습니다."
"예?"
"공과금 처리는 오후 4시 30분까지입니다."
"그래요?"
시계를 보니 4시 40분이다. 10분 늦었다. 그런데 공과금 처리 시간이라는 게 따로 있나? 우체국 어디를 둘러 보아도 그런 시간이 따로 있다는 안내문은 없다.
"여기 언제까지 그런 거 처리한다는 말이 어딨어요?"
"아, 손님. 원래 그렇습니다."
아니 원래 그런 게 도대체 어딨다는 건가. 게다가 지금은 창구가 한산하여 직원들이 바쁠 리도 없고, 우체국 문 닫을 시간은 멀지 않았는가. 지금 시각에 다른 업무를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예금 입출금은 한단다. 그런데 왜 공과금은 안 되는 걸까?
"10분 정도 늦은 건데 그냥 처리해 주시면 안 되나요?"
"내일 다시 오세요."
"......"
손님은 모르는 자기들만의 규정 운운하는 게 슬픈 게 아니라, 코딱지만한 학교에 여기 아니면 공과금 낼 곳이 없다는 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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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야 토끼야 산 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흰눈이 내리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엄마가 아빠가 여름 동안 모아 논
맛있는 먹이가 얼마든지 있단다
    생일을 맞아 우리 세 식구가 외식도 하고 다 떨어진 내 운동화도 하나 새 것으로 바꿀 겸하여 저녁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노래 좀 틀어달라는 딸의 요청에 동요 테이프를 틀어 주었는데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가 분명 있었을 것이고, 그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난 절대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노래를 알기 전까진 토끼가 겨울에 무얼 먹고 사는지도 몰랐고, 겨울이 걱정되지도 않았다. 모든 토끼 가족이 여름 동안 맛있는 먹이를 충분하게 모을 수도 없을테고, 심지어 많이 모았다 하더라도 어느 먹성 좋은 꼬마 토끼가 죄다 먹어버리면 그 추운 겨울에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고, 추운데 밖에 나와 먹이를 못 구하면 아빠 토끼는 집에 가서 뭐라고 말할지도 고민될테고, 빈 손으로 돌아온 아빠를 바라보는 나머지 가족들은 어떤 심정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어린 나이에 그러저러한 생각들로 인하여 꽤 심각하게 들었던 노래다. 그리하여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이 노래는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 들어도 여전히 심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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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첫날

롤플레잉 2008. 9. 1. 16:00
개강을 하고 보니...

  1. 아무리 봐도 방학 동안 몸이 불은 인간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계단 올라가기도 힘든 하루. 오늘부터 저녁은 그냥 제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음...
  2. 수업 시간표도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첫날 첫 수업부터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팍팍 꽂히고, 게다가 같이 듣는 인간들이 거의 없으니... 아무래도 세 과목 정도는 변경해야 할 듯.
  3. 자취방도 제대로 낯설다. 지난 학기 혼자 사는 거에 적응할 만 하니 방학이었는데... 또 이렇게 짐 싸들고 내려오는 길이 심히 유쾌하지 않다.
  4. 심지어 날씨도 안 도와주나. 아침부터 구름이 좀 많긴 했지만 귀찮아서 우산을 놓고 왔더니, 하늘이 가만 두지 않는다. 여지없이 비가 내린다.
  5. 오늘 같은 날은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마침 입에 혓바늘이 돋았다. 얼큰한 찌개도 당분한 안녕이다.
  6. 노트북도 안 들고 왔더니 밤에 집에서 할 게 없다.
  7. 그래 도서관에서 책이나 빌려 보자.

우울한 2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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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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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드디어 여름방학 숙제 중의 하나인 건강검진을 받았다. 원래는 지난 달에 마누라랑 함께 가려 했으나 하필이면 그 때 한바탕 싸우고 내가 청주에서 잠수타는 사연이 있었던고로 귀찮게스리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마누라는 나를 혼자 병원에 보내기를 꺼려했는데, 그 이유는 검진 받는 병원이 일반 종합병원이 아니라 산부인과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반 외왜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건강검진 대상자 또한 아줌마들이 대부분인지라 나 혼자 가면 적응하기 어려울까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어디 그런 걸 두려워할 사람인가...

    확실히 남자 손님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탈의실에서였다. 탈의실과 옷을 넣어두는 캐비닛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탈의와 동시에 옷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캐비닛이 3개 밖에 없었다. 즉 이 병원은 건강검진을 하더라도 남자 손님은 동시에 3명 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걸로 보아, 아침 9시 현재 이 넓은 병원에 나 말고는 남자 손님이 없다는 얘기다.

    아무튼 안내하는 의사 선생이 시키는 대로 했다. 문진표 작성하고 소변 받아오고 피 뽑고... 그러다가 초음파 검사실에 이르렀다. 나로선 초음파 검사가 본의 아니게 이번 건강검진의 하일라이트였는데, 그것은 애초에 검진을 받으려는 목적이 뇌 혈류량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계속되는 투동의 원인이 혹시 뇌에 문제가 아닐까 해서 검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검사 절차가 생각 외로 싱거웠다. 난 나름대로 TV에서 보아오던 둥그런 통에 들어가서 뭐라도 찍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초음파로 목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혈관을 검사하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약간 실망... 그 외에는 이렇다할 건 없었다. 검사를 다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의사 선생이 한마디 한다.

"심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뇌 혈류량도 이상 없구요."
"예..."
"지방간입니다. 중증이네요..."
"예...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어떻게 하다뇨?"
"아니, 지방간이라면서요. 지방간을 없애려면 어쩌면 되냐구요."
"아 그건... 기본적으로 운동은 하셔야겠구요... 술도 삼가하시고... 여기선 검진만 하구요, 자세한 건 결과 나오면 아마도 따로 말씀 드릴 겁니다."
"..."

    검진하는 하는 의사 선생은 설마 지방간이 뭔지 모르나? 이런 당연한 질문에 당황하면 환자보고 어쩌라는 건가? 증상은 아는데 치료법은 모른다는 건가? 아무튼 재밌는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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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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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여름은 유난히 나기 힘들다. 1994년을 제외하면 이렇게 더운 여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체감하는 날씨가 그렇다는 거다. 우리 딸이 어른이 될 때쯤이면, 여름 날씨가 우리 부부 신혼여행 갔던 태국의 날씨처럼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방콕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밟고 공항 바깥 문을 나서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름 나기가 예년에 비해 더욱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중에는 아마도 먹는 것에 대해 맺힌 게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여름철 음식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반드시 먹어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냉면, 팥빙수, 그리고 수박이다. 다른 건 옵션이지만 요 세 가지는 필수 항목이다. 그런데 올 여름 무슨 마魔가 끼었는지 이 세 음식에서 성공한 기억이 단 한 건도 없다. 우선 팥빙수는 어찌된 일인지 먹을 기회가 없다. 오며가며 한 번쯤은 먹을 기회가 올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팥빙수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방금 전에 팥빙수를 노리고 할인마트에 다녀왔는데, 아니 팥빙수 안 파는 맥도날드가 있는 줄 몰랐다. 팥빙수 달라고 했더니 점원이 하는 말이,

"손님, 여긴 팥빙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요? 맥도날드에 왜 팥빙수가 없어요?"
"손님, 여긴 원래 안 팔았습니다."
"이런 썩을..."
이 무더운 여름 내내 먹어본 팥빙수라고는 지난 일요일 조카 돌잔치에 가서 먹어본 게 전부인데, 그나마 그것도 전문적인 빙수가 아니라 얼음 가는 기계 하나 덜렁 갖다 놓고 알아서 소스를 쳐 먹으라는 것이었는데, 팥빙수라는 게 보기보다 쉬운 음식이 아니었다. 어찌해도 제 맛이 나질 않는 거다. 소스를 조금 많이 넣으면 달아서 못 먹겠고, 얼음을 조금 많이 넣으면 완전 맹탕이고... 그래서 결국 올여름 팥빙수는 완전 실패다.

    냉면도 팥빙수 못지 않게 실패한 종목인데, 팥빙수의 경우처럼 먹어볼 기회조차 원천 봉쇄된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앞 분식점(물론 지들은 분식점 아니고 전문 식당이라 우기지만 내가 보기엔 딱 분식점이다. 빙하냉면... 상호부터 벌써 웃기지 않은가 말이다.)에서 두어 번 먹어 본 게 전부다. 그러니 어디 맛이 있겠나. 온면이 아니라는 뜻에서 냉면인 거지, 맛으로 본다면 냉면이라 할 수도 없다. 그나마 방학 이후에는 입에 대 보지도 못했다. 아, 이렇게 우울하게 여름을 보낼 수는 없다.

    팥빙수와 냉면을 먹을 기회가 봉쇄된 것에는 아무래도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어차피 집에서 먹을 수는 없고 외식으로 먹어줘야 되는 종목들인데, 올여름엔 외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마누라가 이번 방학 내내 연수를 받느라 부부 동반 외출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좋다. 이 두 종목은 그렇다 치자. 그럼 수박은 어떠한가. 나를 정말로 우울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팥빙수와 냉면이 아니라 수박이다. 수박은 집에서 먹을 수 있잖은가 말이다. 올여름 수박을 안 먹어봤냐고? 아니다. 꽤 많이 먹었다. 다만 제대로 된 수박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거다. 아니 나한테 대체 무슨 수박의 저주가 내렸길래 걸린 수박마다 이렇게 꾸준히 실패하는가 말이다. 올해 내 손으로 골랐건 남이 골라주었건 관계 없이 맛있게 익은 건 하나도 없었다. 열어보면 죄다 너무 늙어서 흐물흐물하거나 빨간 속살이 무색할 정도로 당도가 떨어지는 놈들 뿐이다. 올해 날씨가 이렇게 안 좋았단 말인가. 아무튼 실패가 계속 쌓이다 보니 더이상 수박을 살 생각도 없다. 아까 다녀온 할인점에서도 마누라가 수박 사지 않겠냐고 했을 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 누가 맛있는 수박을 사서 나한테 연락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어디 맛있는 수박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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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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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에서 학교친구찾기 라는 메뉴가 있길래 무심코 눌렀더니, 초등학교 동기라 일컬어지는 사람들 목록이 떴다. 과연 이 사람들과 내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 다녔단 말인가. 전혀 기억 나지 않는 얼굴과 이름들... 혹시 내가 입학년도를 잘못 입력한 건 아닐까? 그건 아니다. 곧바로 눈에 익은 얼굴이 잡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놈의 얼굴이다. 확실히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벌써 27년이나 흘렀구나...

    반가운 마음은 눈꼽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인데, 전형적으로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유형이다. 5학년 때 이놈에게 학교 건물 뒤로 불려가서 얻어맞았는데, 당시 이유도 모르고 그냥 맞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반 반장 녀석이 나한테 기분 나쁜 일이 있어 이놈을 시켜 시쳇말로 날 손을 좀 봐준 것이다. 반장놈은 또 더도 덜도 아닌 엄석대인데, 나에게 열받은 이유도 듣고 보니 좀 어이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이 내 앞에서 반장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니 근데 왜 내가 당해야 되냐고. 선생님한테 화가 났으면 당사자한테 따지든지, 면전에서 안 되면 밤길에 선생님한테 테러를 하든지... 그렇지만 12살 어린 나이에도 시킨 놈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하라는 대로 하는 놈이 더 미웠고, 더 한심해 보였다. "이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오야붕이 시키는 대로 하면 행복할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어릴 때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미니홈피에 올라온 그놈의 얼굴이 그럭저럭 행복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정말로 평범하게 늙어서 한심한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지만 오히려 후덕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 얼굴이란... 저렇게 살던 놈도 나이 먹고 사회 생활을 하고 결혼하고 그러는구나. 또 저런 멀쩡한 표정이 나오는구나...

    그놈은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었겠지만, 난 덕분에 무의식 속에서 고이 잠자던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놈에게 끌려가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놈이 나를 두들겨 패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 한심한 청춘을 내가 얼마나 경멸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몇 발짝 앞서 가던 놈이 갑자기 몸을 돌려 멋지게 내 복부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마치 통나무가 쓰러지듯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왼쪽 뺨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대고 보는 세상의 풍경... 아랫배의 극심한 고통도 잠시, 빨리 이 시간이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 사건 이후 그놈을 경멸하는 맘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두려운 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거나 그놈의 주먹은 매웠으며 내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놈보다 몇 배는 싸움을 더 잘한다는 반장은 대체 얼마나 세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이놈을 결정적으로 업수이 여기게 된 사건이 터졌다. 11월 생일이 다가왔는데 어머니께서 어쩐 일로 집에서 생일파티를 열어줄테니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평소 각별하게 지내던 놈들로 파티멤버를 꾸렸는데, 며칠 후 이놈이 나한테 다가오더니 실실 웃으며 내 생일에 자기를 초대해줄 수 없겠냐는 거다. 아니 얘가 정신 나갔나.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판에 파티 초대라니. 혹시 이놈이 나를 놀리는 건가...

   근데 의의로 놈은 진지했다. 자긴 이제껏 생일 파티에 초대된 적이 없었으며, 이번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랬다. 이놈은 내 상상을 초월하여 단순한 인간이었던 거다. 나를 두들겨 팬 건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대장이 시켜서 한 짓이었다. 지금은 단순히 생일 파티가 궁금해서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고... 사람이 이렇게 단순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그놈도 멤버에 끼워서 밥 한 끼 먹여 보냈다. 그 후로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에게 살갑게 굴어서가 아니라 이런 놈은 더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피해 가거나 으르는 법만 알면 되는 거다.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그 많은 만남 만큼이나 많은 헤어짐이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유형의 인간을 그 이후로는 내 삶에서 자주 만날 수 없었다는 것과, 커가면서 내가 이런 인간들을 적당히 피해갈 줄 아는 영악함 또는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뱉고 보니, 나는 혹시라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누군가에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던 적은 없는지 한번 돌아보게 된다.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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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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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앞에서 걷는 사람은 한눈에 봐도 주동자다.
왼쪽에서 걷는 사람은 당연히 좌경용공이다.
오른쪽에서 걷는 사람은 누가 봐도 극우파시스트다.
뒤에서 걷는 사람은 물론 배후세력이다.
중앙에서 걷는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핵심인물이다.

바빠 죽겠는데 오랜만에 왜 이런 옛날 우스개 소리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역시 시험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시간이 남아돌 때보다 오히려 이런 잡생각이 더 잘 나니 말이다.
아 지겹다.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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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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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버릇

롤플레잉 2008. 4. 7. 19:57
    술을 곱게 배운 사람들이 있나 하면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나쁜 술버릇을 가진 사람을 말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꼽는 한 대학 동기도 있으나, 그래도 비교적 내 주위 사람들은 건전하고 온순한 술문화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술먹고 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술버릇까지 없는 건 아니다. 술만 마시면 조는 사람,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 논쟁하듯이 얘기하는 사람, 갑자기 자리를 떠서 한 30분씩 사라졌다 돌아오는 사람, 술만 마시면 어디론가 전화하는 사람,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해서 듣는 사람들 인내력을 길러주는 사람...

    소주 세 잔 정도에 저렴하게 얼큰해지는 나도 남들에게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 않은 술버릇이 있다. 뭐 남에게 피해가 가는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 자랑하고 싶지도 않은 술버릇인데, 바로 술먹고 망가지는 꼴을 못 본다는 거다. 난 상대방이 누구라도, 어떤 술자리라도, 그 사람이 뻗으면 고이 놔두고 자리를 뜬다. 당연히 술에 취해 휘청거린다 해도 옆에서 부축해 준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상대방이 술먹고 길에 엎어지든 말든, 얼어죽든 말든 내 상관할 바 아니다. 인사불성이 된 동료를 택시 잡아 보내주고, 심지어 집까지 데려다 주는, 이른바 끝까지 챙겨주는 사람들을 골이 비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자기 몸 자기가 못 챙기는 병신 쪼다들을 내가 왜 챙겨주는가. 그냥 길에서 뻗었다가 아리랑치기라도 당하게 내버려두지 말이다.

    이런 좋지 않은 버릇은 또 다른 버릇으로 이어지는데, 제아무리 평소에 멀쩡하고, 심지어 뛰어나고, 똑똑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술 먹고 망가지는 모습을 내게 보이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머리 속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아주 고약한 나만의 술버릇이다. 이렇게 내 삶에서 아웃된 사람들이 꽤 있는데, 사실 이런 술버릇은 내 삶에 그다지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래봐야 아웃되는 사람만 늘어나지, 술버릇이 좋아서 내 평가에서 업그레이드 된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말 그대로 밑져봐야 본전인 데다가, 이놈의 아웃 제도는 삼진도 아니고 원 스트라이크에 바로 결판이 난다는 점에서 내 스스로도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다.

    그런 면에서 지난 학기 나를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 한 분을, 정말로 감탄할 수는 있어도, 끝내 존경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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