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

카테고리 없음 2013.02.25 23:51

Evernote, delicious, clipboard, 네이버 메모 등등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갈무리나 메모해 두는 건 참으로 많은데, 문제는 그렇게 해 두기만 한다는 점. 나중에 다시 돌아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 놓고선 나중에 같은 내용을 또다시 갈무리하면서 괜찮은 걸 찾았다고 좋아한다. 바보…

정말로 정보는 적어서가 아니라 많아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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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dev.net

카테고리 없음 2013.02.25 23:43

오랜만에 gamedev.net에 들렀는데, 아무리 해봐도 결국 로그인 실패. 기억나는 건 아이디밖에 없다. 생각낼 수 있는 모든 패스워드는 다 넣어 보았지만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패스워드를 잊었을 경우 가입할 때 등록한 메일 주소로 새 패스워드를 보내준다는데, 그 메일 주소도 모르겠다. 알 만한 메일 주소는 모조리 때려넣었으나, 빗장은 열리지 않고 굳게 닫힌 대문은 비웃기만 할 뿐. 비록 메일 주소를 몰라도 아이디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면 등록된 메일 주소로 패스워드가 간단다. 그런데 난 그 메일 주소를 모른다니깐. 아마도 지금은 없어진 포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긴 한데. 그것도 모르지.

이 사이트에 마지막으로 로그인한 게 짧게 잡아도 6~7년은 되었을 거다. 그 얘기는, 사실 이 사이트가 내 삶에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라는 얘기. 로그인 같은 거 안 해도 사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부터 이곳은 비회원에게 컨텐츠를 막는다거나 하는 것도 없다. 심지어 페이스북이나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해도 된다. 그래서 결국은 구글 계정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뭔가 아쉽다. 이런 것도 기억해내지 못해서 아쉬운 건 아니다. 사실 이토록 버려두었던 곳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게 비정상이다. 그동안 주욱 패스워드 변경 없이 살아왔다면 그게 더 큰 문제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 문전박대 당하면 눈물 난다. 이건 좀 아니다. 이런 경우 왠지 그동안의 삶이 휴지통에 버려진 것 같다. 여기 말고도 그런 곳이 두어 곳 더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기분…

지금 들어간 구글 계정과 예전의 계정을 합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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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집에서만 뒹구는 것도 사실 고역이다. 그래서 두 딸 데리고 도서관에 책 보러 나왔다. 가는 길에 놀이터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집에서 볼때와는 다르게 나오니까 여전히 바람이 차다. 그래도 애들은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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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p1040532

오늘의 사연은 "실내가 춥다"는 거란다. 그래서 누구라도 건들기만 하면 바로 터져버리겠다는 의연한 각오로 임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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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방학을 한 큰딸은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방학에도 집에서 방구석에서 뒹굴지 못하고 학교의 돌봄교실에서 낮 시간을 보낸다. 다만 방학 기간에는 등교 시간이 30분 늦어지기 때문에 출근길에 큰딸을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 주는 나도 덩달아 출근 시간이 그만큼 늦어진다.

며칠 전 아침, 여느 때처럼 학교 앞까지 딸을 데려다 주고 그길로 15분을 걸어 지하철을 타러 새절역까지 왔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9시 20분. 계속되던 흐린 날이 물러가면서 그날은 화창했다. 햇빛에 눈이 부시다. 여름도 아닌데 벌써 선글라스를 껴야 하나 생각하면서 지상에서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뭔가 보통 때와는 다른 느낌이 척추를 훑어내리면서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이상한데? 왜 사람이 없지?"

찰라의 의문과 어색함이 지난 후 이 이질적인 분위기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렇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새절역에 사람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새절역은 유동 인구를 고려하지 않고 주민들의 민원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만들어준 전철역이 아니다. 여긴 어느 때라도 지나는 사람들로 넘치는 곳이다. 하물며 아침 출근 시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는 게 아침 시간의 재미 아니던가. 그런데 이 계단에 사람이 없다니.

화창한 날씨와 대비되어 계단 밑은 다른 때보다도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밝은 지상에서 어두운 지하세계로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 우습게도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 길을 다 내려가면 평소 내가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새절역이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차원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 길로 이어진 그 세계는 모험과 환상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우울하고 절망적인 사연들이 기다리는 세계일 것 같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들 신체의 한 군데쯤은 상실되고 뒤틀린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짧은 순간에 이 계단을 계속 내려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찌르르하고 흘러간다.

"어쩌지?"

그러면서도 두 다리는 여전히 관성(?)의 법칙에 의해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갔다. 어쩌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재앙이 닥친다고 명민하게 대처하는 주변머리는 부족하잖아. 알면서도 당하는 거지 뭐. 그런 생각으로 거의 계단을 다 내려오는데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그럼 그렇지. 하하하. 이거 쑥스럽구먼.

항상 사람들로 북적대는 지하철역이라고 해도 유동인구의 밀도가 일정하리라는 법은 사실 없을 것이다. 비록 출근 시간이라도, 물론 드문 경우이긴 하겠지만, 이렇게 잠깐의 결핍(?)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말 그대로 인파, 즉 웨이브잖아.

생각해 보면 불과 10초 남짓한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아침에 잠이 덜 깬 것도 아닌데,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한 일이 잠깐 동안 나에게 벌어졌다. 봉화산행 열차에 앉아 합정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탈 때까지 좀 전의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봤다. 내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숨어있는, 일탈을 바라는 욕망이 분출한 것인가. 아니면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의 부작용인가. 어쨌거나 짧은 순간에 끝나서 다행이다. 모험을 떠나는 건 좀 귀찮다. 일단 살부터 좀 빼야 뭘 해도 하는 거지.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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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카테고리 없음 2013.02.18 01:16

어제 오늘 이틀간 거실에 매트 깔아놓고 요가 동작을 어설프게나마 좀 따라했더니, 몸이 마치 국토대장정이라도 다녀온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몸을 이렇게나 방치해 두었단 말인가. 참으로 지은 죄가 많다. 이렇게 아픈 건 벌이라고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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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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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한복음」 1장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이 교회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곳은 분명 교회였다. 비록 정면에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간혹 다른 곳에서 그것을 대신하기도 하는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것도 없었지만, 누가 옆에서 이곳을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한눈에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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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십자가를 대신하는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교회에서 일반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제껏 그런 교회를 딱 한 번 보았을 뿐이다.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성남교회라는 곳인데, 언제, 왜 그곳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다. 아마도 그 교회의 총동원 전도 주일에, 말 그대로 동원되어 간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어쨌거나 그 교회에서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 같은 건 오래 전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머리 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교회의 자랑인 스테인드글라스이다. 교회 바깥으로 부터 들어오는 햇살이 색유리를 통해 걸러지면서 눈을 힘들게 하지 않을 정도로 은은하고 안온한 빛으로 바뀐다. 그림의 내용은 어린양을 안고 있는 예수의 모습인데, 한마디로 장엄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편안한 느낌.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시 한번 그곳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시 아까의 교회로 돌아오자면, 아무튼 그 교회는 객관적인 정황으로는 교회라 할 만한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는 성가 반주용 피아노도 없다. 푸른 빛이 감도는 옅은 회색의 콘크리트 방. 밖으로 나 있는 흔한 창문도 없었고 오직 등 뒤의 출입문 말고는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다. 조그만 방은 아니고 약간 작은 규모의 강당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곳엔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다. 그럼 의자 없이 어떻게 예배를 보는가. 여기선 모두들 서서 예배를 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불편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여긴 원래 그런 공간이니까. 그 대신 이 공간을 다른 곳과 구별시켜 주는 장식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면과 좌우의 세 벽에 걸려 있는 전광판이다. 아직 전원이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예배에 필요한 것은 확실하다. 저 전광판은 이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시간은 저녁 무렵이다. 배가 약간 부른 걸로 보아 조금 전에 저녁식사를 마친 듯하다. 물론 벽에 시계도 걸려있지 않은데다가 창문도 없으므로 시간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때가 저녁이라는 믿음을 철회할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말하지 않아도, 옆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저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적당한 피곤함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침이나 낮이라면 이보다는 훨씬 몸이 가뿐하리라. 그렇다고 해서 몸이 불편하거나 서 있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몸의 상태는 분명 하루를 마감하는 그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이 시공간으로 소환된 걸까. 이 교회까지 걸어온 기억은 전혀 없다. 다른 공간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장면 전환이 이루어졌고, 주위 사물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예배 시간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걸로 미루어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장면들이었다. 난 이미 이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그것도 신참은 아니리라.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위에 아무도 아는 얼굴이 없다는 점. 그렇다. 모든 것이 내집처럼 편하고 익숙하긴 한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가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낯설게 대하거나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들과 무슨 말을 해 본 것도 아니다. 사실 모두가 선한 웃음을 띠고 있을 뿐, 서로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서서 곧 시작될 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창시절의 아침 조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정경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곧 목회자가 들어와서 정면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내가 이 교회 신도 맞나? 목사는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었으나 호감을 주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염은 말끔하게 깎았고 머리카락은 짧게 잘랐다. 얼핏 보면 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배와 무너져가는 턱선은 가릴 수 없었다. 그래도 평소 어디서 운동이라도 꾸준히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체적으로는 균형 잡힌 몸매를 자랑했다. 입고 있는 양복도 그만하면 훌륭하다. 흰 셔츠에 넥타이는 메지 않았으나 그것이 단정하게 보이지 않는 건 아니고 오히려 이 자리를 편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교회에 소환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도 어떤 안내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신앙고백도 없었고 찬송도 없었다. 물론 기도도 없었다. 그러면 바로 목회자의 설교로? 그것도 아니다. 이 교회는 다른 곳과는 예배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그동안 꺼져 있던 전광판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목사의 역할은 아주 단순했다. 예배를 인도하는 역할이 그것인데, 그게 초등학교 체육교사보다도 더 쉬운 일이었다. 그냥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향만 지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른쪽으로!”, “정면으로!”, “자 이젠 왼쪽으로!” 라는 목사의 지시에 따라 모두들 서 있는 자리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 눈앞의 전광판에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낱말 또는 그에 준하는 복합어가 표시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리내에 힘차게 읽었는데,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음악 시간처럼 서로 입을 맞추어 읽었다. 목사의 인도에 따라 방향을 돌릴 때까지. 그리고 다른 건 없었다. 그게 다였다.

처음에는 좀 우스웠다. 나도 사람들 틈에서 함께 그 낱말을 읽었지만 “무슨 놈의 예배가 이런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런데 그게 이 예배의 매력이었다. 일단 다른 교회처럼 목사의 따분하고 뻔한 설교를 꾸벅꾸벅 졸면서 들어주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단순 반복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늘’이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여러 사람이 입을 맟춰 큰 소리로 말하다 보면 뭔가 모르게 그 낱말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나 필요성 등 알 것 같았다. ‘하늘’, ‘공기’, ‘바닥’, ‘평등’, ‘평화’… 평소에는 무심코 사용하던 말이었데. 그런데 이렇게 천천히 소리내어 읽어보면, 그간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친해진 사람들과 같다고나 할까. 마치 2학년 때까진 같은 과라도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할 뿐 그 외에는 거의 깊은 얘기를 안 하다가, 제대 후 복학해서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 같은 거 말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한동안 흘러갔다. 사람들의 감정은 제시되는 낱말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져 갔다. 행복감을 주는 말이 나타나면 그에 따라 사람들도 웃고, 슬픔을 물고 오는 낱말이 나타나면 그에 따라 기분도 떨어졌다. 처음에는 두 음절의 낱말이 제시되었으나 나중엔 형용사와 명사의 쌍으로 이루어진 말이나 복합어들이 나왔다. ‘새엄마’, ‘옷가게’, ‘아름다운 아침’ 같은… 이때까지는 아주 만족스러운 예배라 할 수 있었다. 세상엔 이런 예배도 있구나. 이 얼마나 충만한 저녁인가. 그런데 목사가 다시 왼쪽 벽으로 우리를 인도했을 때였다. 그때 전광판에 나타난 말은 바로 ‘봉급생활자’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면서 온몸이 얼어버렸다. 그와 함께 목구멍에서 무언가 뜨겁게 올라왔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봉급생활자, 봉급생활자, 봉급생활자…” 큰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들 괴로워했다. 무릎을 꿇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아 우리가 이렇게 나약한 존재였던가. 봉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나. 저 말 한마디에 마치 십자가와 마늘을 본 흡혈귀들 마냥 모두들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이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아!” 두 눈엔 힘없는 눈물이 흘렀다.

———

이렇게 괴로운 맘으로 잠에서 깼다. 사실 최근의 꿈도 아니고 몇년 전의 것인데다가,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통해서도 말한 바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이 또한 곧 망각의 강을 건널 것이 틀림없기에 오늘 몇 자 적어둔다.

근데 교회 다니냐고? 유물론자에게 그런 거 물어보면 실례가 아닌가.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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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카테고리 없음 2013.02.09 02:46
불 끄고 자리에 누웠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이대로 그냥 자 버리면 내일 아침 일어나서 분명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간략하게나마 메모해 놓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 보니 생각이 정리되기는 커녕 이리저리 마구 흩어질 뿐만 아니라, 그나마 간신히 부여잡은 파편들도 누워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시시하고 재미도 없고 별로 쓸모도 없을 것 같다.

괜히 눈만 따끔거리고 아까운 시간만 버리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수면 시간을 침탈 당한 것 같아 심히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잠시, 뭔가 모르게 이런 게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는 시덥잖은 생각으로 약간 행복해졌다.

결론적으로 별로 기분 나쁘지 않게 잠자리에 들 것 같다. 중간에 깨지만 않는다면 거의 완벽한 밤이리라. 자자.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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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골드바흐의 추측』 이후 실로 십수 년 만에 읽는 수학소설―물론 이런 장르도 있다면―이다. 이런 소설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심지어 나 몰래 영화까지 나온 걸 보면, 그 영화 어지간히 못 만들었나 보다.

수학을 소재로 한 글은 내게 즐거움과 동시에 약간의 괴로움을 함께 가져다 주는데,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도중에 자꾸 곁길로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소설 초반부터 친화수親和數(우애수友愛數)가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둘러가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다. 이제껏 알려진 가장 작은 친화수인 220과 284가 나왔는데, 다른 친화수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짐과 동시에 그것을 구하는 알고리즘을 머리 속에 그려 보기 시작했다. 우선 주어진 수의 약수를 구해야 하고, 그 약수들의 합을 통해 반대편 수가 만들어지면 그 수의 약수와 그 합을 구해서 원래의 수와 비교하고… 이 정도면 괜찮았는데, 곧이어 1부터 1억까지의 자연수 중에서 소수素數(prime number)의 개수를 구하는 함수를 만들어야 했다. 5761455개가 바로 그 답이라는데, 이걸 그냥 믿으면 되겠나. 직접 구해 봐야지 않겠나. 예전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분명히 C나 파이썬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하더라. 다행히도 그 이후에는 특별히 옆으로 샐 만한 거리가 없었다. 후반부의 오일러의 등식 빼고.

등차수열의 합을 구하는 공식이 등장하는 부분을 읽을 땐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3학년 때가 떠올랐다. 사실 이 공식을 생각하면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10살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등차수열의 합, 정확히 말하면 1부터 10까지의 합을 구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내가 이루어낸 첫번째 수학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 없이 무심히 흘러가던 10살의 어느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때 우리집에 한 서적 외판원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어린이용 학습만화나 백과사전류의 책들을 팔러 다니는 외판원이 많았다.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조기 수학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정열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내게 제시한 문제가 1부터 10까지의 합 간단히 구하기였다. 듣는 순간엔 막막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도전 과제는 한 가지 맹점이 있는데, 도전자로 하여금 "여기엔 반드시 간단한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내가 이 아저씨를 통해서가 아니라 방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주제를 생각해 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박사의 말처럼 답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어려운 법이지, 답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문제는 하나도 어려운 게 없다. 그런 면에서 내가 나름 눈치가 전혀 없진 않았나 보다. 분명히 존재하는 법칙을 이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잠깐 동안 그 수들을 빤히 노려보았더니 역시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1과 10의 합과 2와 9의 합이 같음을 발견한 것이다. 3과 8, 4와 7, 그리고 남은 것은 5와 6 쌍. 정답은 11 × 5 = 55. 짜릿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1부터 100까지의 합도 두렵지 않다. 주어진 수열의 처음과 끝을 더한 값에 수열의 개수를 2로 나눈 값을 곱해 주면 된다. 수열의 개수가 홀수인 경우엔 중앙값을 제외했다가 나중에 따로 더하면 되고. 당연히 주어진 문제를 풀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외판원 아저씨는 "아드님이 참 똑똑하시네요" 라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남기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서야 했지만, 그날 내가 얻은 작은 수학적 성공을 도와주신 그 아저씨가 없었다면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등차수열의 합이 내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삶은 대체 어떤 것일까. 아무리 내가 지금 머리 속으로 그려 본다고 해도 실제로 그 상황 속에 놓이지 않는 이상 박사의 삶을 완전히 공감하긴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메모해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곧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 일어나면 자신이 처한 상황부터 다시 인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즉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부터 맨 처음으로 숙지하면서 하루를 절망 속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게다가 매일 메모가 쌓인다면 일어나서 한숨 한번 쉬고 곧바로 그간의 메모들을 죄다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내게 왜 이런 형벌이 주어졌는지 한탄하기도 바쁜 와중에 그 많은 메모들이 머리 속에 들어오겠으며, 또 그 정보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을까. 그뿐만 아니라 주어지는 정보는 날이 갈수록 불어날텐데 말야.

사실 소설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그리 칭찬해 주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우선 박사와 그의 형수와의 관계가 별로 매끄럽지 않다. 정지한 시간 속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거창한 관계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수가 등장하는 분량은 민망할 정도로 적다. 아님 말고 식으로 감히 넘겨짚자면, 박사와 형수의 이야기가 잘 전개되지 않아, 소설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작가가 그 부분을 통으로 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박사가 사랑한 수식', 즉 오일러의 등식이 주는 임팩트도 좀 부족하다. 소설이 이 수식의 아름다움을 과연 얼마나 제대로 표현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박사가 그 순간 왜 이 수식을 내밀었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강하지 않다. 물론 이 부분이 작자로서도 어려웠을 터인데,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는 순간 독자들의 책 덮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결정적으로 이 책에서 맘에 안 드는 것은, 왜 박사가 유독 아이들에게는 관대하고 친철하고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엔 누가 옆에서 말 거는 것도 싫어하고 밥 먹는 것도 거르는 사람이 파출부의 아이만 나타나면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 헌신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아이에 대한 특별히 좋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박사가 기억하는 것은 파출부에게 열 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다는 정도 아니던가.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좋아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박사가 가진 격려의 힘 때문이다. 수학에 관한 아무리 작은 문제 제기라도, 아무리 사소한 성취라도 절대 놓치는 법 없이 무한히 격려해 주는 박사의 품성, 성급하게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들은 애 키우는 부모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말은 쉽지만 행동하긴 쉽지 않다는 게 여전히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은 몇 번의 이사 중에 잃어버렸다. 일부러 버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아까웠던 기억도 없다. 재밌게 읽었으나 또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소설. 그러나 이 책은 소장하고 싶다. 나중에 다시 읽고 싶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딸이 이 책을 보고 수학에 조금은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부모의 욕심에…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봐도 아동문학은 아닌데 딸에게 읽히는 건 좀 아닌 듯하다. 관심을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고. 정말로 욕심은 욕심일 뿐.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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