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의 문

분류없음 2013.02.22 01:49

봄방학을 한 큰딸은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방학에도 집에서 방구석에서 뒹굴지 못하고 학교의 돌봄교실에서 낮 시간을 보낸다. 다만 방학 기간에는 등교 시간이 30분 늦어지기 때문에 출근길에 큰딸을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 주는 나도 덩달아 출근 시간이 그만큼 늦어진다.

며칠 전 아침, 여느 때처럼 학교 앞까지 딸을 데려다 주고 그길로 15분을 걸어 지하철을 타러 새절역까지 왔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9시 20분. 계속되던 흐린 날이 물러가면서 그날은 화창했다. 햇빛에 눈이 부시다. 여름도 아닌데 벌써 선글라스를 껴야 하나 생각하면서 지상에서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뭔가 보통 때와는 다른 느낌이 척추를 훑어내리면서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이상한데? 왜 사람이 없지?"

찰라의 의문과 어색함이 지난 후 이 이질적인 분위기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렇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새절역에 사람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새절역은 유동 인구를 고려하지 않고 주민들의 민원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만들어준 전철역이 아니다. 여긴 어느 때라도 지나는 사람들로 넘치는 곳이다. 하물며 아침 출근 시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는 게 아침 시간의 재미 아니던가. 그런데 이 계단에 사람이 없다니.

화창한 날씨와 대비되어 계단 밑은 다른 때보다도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밝은 지상에서 어두운 지하세계로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 우습게도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 길을 다 내려가면 평소 내가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새절역이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차원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 길로 이어진 그 세계는 모험과 환상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우울하고 절망적인 사연들이 기다리는 세계일 것 같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들 신체의 한 군데쯤은 상실되고 뒤틀린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짧은 순간에 이 계단을 계속 내려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찌르르하고 흘러간다.

"어쩌지?"

그러면서도 두 다리는 여전히 관성(?)의 법칙에 의해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갔다. 어쩌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재앙이 닥친다고 명민하게 대처하는 주변머리는 부족하잖아. 알면서도 당하는 거지 뭐. 그런 생각으로 거의 계단을 다 내려오는데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그럼 그렇지. 하하하. 이거 쑥스럽구먼.

항상 사람들로 북적대는 지하철역이라고 해도 유동인구의 밀도가 일정하리라는 법은 사실 없을 것이다. 비록 출근 시간이라도, 물론 드문 경우이긴 하겠지만, 이렇게 잠깐의 결핍(?)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말 그대로 인파, 즉 웨이브잖아.

생각해 보면 불과 10초 남짓한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아침에 잠이 덜 깬 것도 아닌데,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한 일이 잠깐 동안 나에게 벌어졌다. 봉화산행 열차에 앉아 합정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탈 때까지 좀 전의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봤다. 내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숨어있는, 일탈을 바라는 욕망이 분출한 것인가. 아니면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의 부작용인가. 어쨌거나 짧은 순간에 끝나서 다행이다. 모험을 떠나는 건 좀 귀찮다. 일단 살부터 좀 빼야 뭘 해도 하는 거지.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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