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은 이러하다.
- 원래는 하루키의 1Q84를 읽을 생각이었다.
- 그런데 TV로 12월 19일의 선거 결과를 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대갈등이 이번 선거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 지역갈등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나? 전남과 경북의 각 후보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서 혹시 저들은 조지 오웰이 말한 '2분간 증오Two Minutes Hate' 같은 걸 매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하루키로 가기 전에, 오랜만에 1984를 다시 펼쳤다.
- 사람은 어느 시점을 지나면 나이가 들수록 디테일이 뭉개지는 것 같다. 분명히 예전에―물론 아주 오래되었지만―읽었던 것이고, 그것도 당시에도 엄청난 충격 속에서 읽었던 소설인데, 전체적인 줄거리와 몇몇 핵심적인 용어 등만 생각나고 다른 건 너무나 생소하다. 내가 정말로 이 글을 읽었던 게 맞나? 혹시 내 기억도 조작된 건가? 전에 봤을 때에도 이런 사건이 있었던가? 내가 예전에 본 건 혹시 축약판 같은 게 아니었을까? 마치 이 소설을 처음 보는 기분이라 기뻐해야 되는 거 맞지?
- 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Big Brother를 '대형大兄'으로 번역했었다. 이번에는 원문 그대로 '빅 브라더'로 사용하고 있다. 대형에 익숙한 나로서는 처음에 이 부분이 제일 어색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대형보다는 빅 브라더가 더 적당한 용어가 아닐까 싶다. 대형이라고 하면 뭐랄까 이소룡의 당산대형이나 범죄조직 삼합회 분위기가 물씬 나지 않나? 아무튼 번역을 어떻게 했나 궁금하여 수시로 영문과 대조하다 보니 생각보다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 처음엔 작자 오웰의 분신이 윈스턴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 오웰의 분신은 오브라이언이라 할 수 있겠다. 오웰은 오브라이언의 손과 입을 빌어 본인의 얘길 한다. 오브라이언이 '그 책The Book'의 저자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Power is not a means, it is an end. ... The object of persecution is persecution. The object of torture is torture. The object of power is power." 라고 말하는 순간 어느새 오웰이 윈스턴을 심문하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런 디스토피아 소설을 보면서 마음껏 대상화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요새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사회가 최소한 권위주의의 터널은 벗어났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은 됐는데, 한순간 방심하는 사이 다시 그 터널이 눈앞에 나타난 게 아닐까 걱정되는 사람은 나뿐인가. 그리하여 2012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껏 우울하다.
- 원래는 하루키의 1Q84를 읽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루키를 읽었어야 옳았을지 모르겠다. 아니, 하루키를 읽었어도 여전했을까.
'엔터테인먼트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차수열의 합 (0) | 2013.02.05 |
---|---|
나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기를 신께 빈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0) | 2010.11.07 |
[도서] 달의 바다 | 정한아 | 2007년 - 현실과 환상의 적당한 거리 유지, 양보, 그리고 화해 (0) | 2010.10.15 |
최근 읽기 시작한 맥주에 관한 책: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 (0) | 2010.10.03 |
피터 시스의 『TIBET Through the Red Box』 (0) | 2010.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