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할 일을 여유 있을 때 미리 끝내 버리는 유형의 사람이 가끔씩 있는데 바로 내 아버지이다. 가까이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삶이 꽤 피곤해진다. 당연히 당신의 아들이랑 이 문제에 대하여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굳이 아버지로부터 욕을 먹어서가 아니라 준비성 있게 미리미리 할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흉내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기한이 다 되어 마지막 순간에서야, 벼랑 끝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일이 된다. 명을 깎아 먹는 짓이라는 거 다 안다. 그렇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미리미리 하면 누가 손모가지를 꺾어놓는 거 절대 아니지만, 매번 이렇게 마지막에 몰릴 때마다 자괴감이 들지만,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해야 할 일 중에서도 특히나 부담 혹은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기획서 같은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첫 직장의 월말 결산 작업 같은 것도 절대 미리 해 본 적이 없다. 기획서야 얼마나 걸릴지 깜냥이 안 되는 고로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시작하게 되지만, 월말 결산이야 말로 궁극의 벼랑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자료 정리에서부터 스프레드 시트에 입력, 자료 수정, 보고 자료 출력 까지, 이런 판에 박힌 일상적인 업무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통빡이 나오기 때문이다. 보고해야 할 전날 야근할 때면 언제나 든든히 먹고 밤을 꼬박 새울 각오를 했다. 어차피 미리 해 봐야 손에 잡힐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사는지 그때마다 회의가 든다.

2주 전에 과제를 받았다. 이번만큼은 미리 해치우고 싶어 책도 미리 다 읽어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 없이 마감 전날이 되었다. 그냥 체념하고 이렇게 살자.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내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나라는 인간은 절대 미리 해 놓는 법은 없어도, 꼭 해야 하는 순간엔 그래도 어찌어찌 다 하긴 하잖는가 말이다.

근데 지금 이렇게 과제 대신 다른 글이나 쓰는 걸로 보아 아직 벼랑 끝은 아닌가, 혹은 이것도 점점 내성이 생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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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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