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으로 엠티를 갔다. 속리산이 어디인가. 바로 중학교 수학여행지가 아니던가. 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관광지 숙박업체의 베짱 장사는 여전하다. 화장실 변기가 막혀 물이 안 내려가는데도 들은 척 만 척이고, 형광등은 전구 둘 중 하나만 불이 들어와서 방이 컴컴하다. 식사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박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이틀째 점심은 밥이 설익기까지 하다니...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엠티는 재밌었다. 물론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내가 민폐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심히 걱정이 된다. 조별 달리기는 특히나 그렇다. 간만에 무리를 했는지 지금도 온몸이 뻐근하다. 나이 들어 애쓴다고 심사위원들이 봐주셨는지 저녁 식사 후 벌어진 노래자랑에선 1등도 먹었다.

엠티 참가원의 최대의 관심사는 뭐니뭐니해도 이튿날 아침 산행에 있었다. 내가 만나본 그 누구도 속리산 등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장대'라는 말은 언제나 공포가 뒤에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산행이 취소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데도 당연히 올라간다니. 아마도 위정자 중의 누군가는 백성의 고통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수학여행의 기억으로도 문장대는 결코 유쾌하지 못하다. 등반의 고통과 고도에 따른 물가는 죽음의 상승작용이 된다. 아무튼 최소한 내가 아는 바로는 비가 와서 산행이 취소되기를 모두가 바랐다. 염원이 크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지 않고 부슬부슬 내리는 바람에 혹시나 주최측의 강행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으나, 비는 뒷심을 발휘하여 강하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내려 주었다. 고마울 따름이다.

산행이 취소된 대신 법주사에 대한 약식 강의가 이루어졌다. 한국사 전공 선생님께서 법주사의 관련 지식을 준비해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의 강의는 졸리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이는 선생님 자신도 인정하고 계셨다. 대체 얼마나 졸리길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보통은 5분 정도면 조는 사람이 있다더니 간밤의 술로 다들 무리를 했는지 2분도 안 되어 벌써 고개가 떨어지는 사람이 몇몇 보인다.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지는지 요새는 좀처럼 조는 일이 없는 나로선 처음엔 그닥 믿질 않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5분이 넘어갈 무렵 의식 저편에서 잔잔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잠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선생님은 인간이 어떤 조건에서 수면에 드는지를 정확히 알고 계신 듯하다. 웬만해선 이렇게 졸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꿈까지 꾸고야 말았다.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선생님의 설명이 절묘하게 겹쳐지면서 꿈 속에서 법주사를 돌아다닌 것이다. 이번 엠티는 보람이 있다. 굳이 빗속을 걷지 않고서도 구경 잘 하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엔 워낙 과 규모도 크고 한 과목에 배정된 교수 인원도 많았던 관계로 악명 높은 교수님의 경우엔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피해갈 방법이 없다. 전공 3시간짜리 연강을 어떻게 버텨낼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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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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