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촌지

패밀리 2006. 3. 19. 00:24
아내의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이다. 요새 만인의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그 초등학교 교사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선생님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 하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실무보다는 관리 쪽으로 일의 비중이 옮겨갈 수밖에 없고, 그 관리라는 것이 또 그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인지라, 조직에 충성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객으로 살자는 생각에 아내는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임용고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기대는 안 했건만 몇 달 뚝딱뚝딱 공부하는 것 같더니 재수 한 번 없이 덜컥 붙어버리지 뭔가. 기특하기도 하지... 의외로 공부 머리가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 내가 다시 공부하네 어쩌네 하는 것도 다 아내 덕이다.

아내는 교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촌지라는 것을 받은 적이 없다. 난 하도 신문에서 촌지 촌지 하길래 교사라는 직업이 원래 그걸 안 받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말 못하는 딱한 사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었다.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전혀 아니었다. 그런 거 안 받아도 아무도 뭐라 그러는 사람 없고, 그런 거 없이도 멀쩡하게 애들 잘만 가르치더라. 우리 부부의 궁합 중에 하나가 바로 '도덕률을 적용함에 있어 융통성을 부리지 않는다'는 점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양심적으로 산다는 얘기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내가 당하기 싫은 거 남한테 하지 않고 산다. 이런 부분이 서로 잘 맞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날강도 남편이랑 사기꾼 아내랑 사는 게 좋은 사람도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내 세계관으로는 용납 못한다. 아무튼 그런 고로 아내는 이제껏 현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상응하는 유가증권이나 공연 티켓 등은 물론 자그마한 선물 하나라도 집에 들고온 적이 없다. 그런 아내에게도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바로 음식이다. 음식의 경우엔 우선 돌려 보낼 수가 없다. 상하면 아깝지 않은가. 또한 음식은 반 학생들이나 동료 교사들과도 나누어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에도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말라는 말은 빼놓지 않는다.

올해 초 아내가 학교를 옮겼다. 집에서 안양까지 출퇴근하기가 너무 멀어 학교를 옮겼는데 일산으로 발령이 났다. 처음엔 가까워졌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출근해 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10분 정도밖에 단축이 되질 않는다고 한다. 암튼 새 학교에서의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며칠 전엔 교실 환경미화 후에 학부모들이 학교에 찾아오는 날이 있었다. 그날 퇴근길에 아내가 가지고 온 것이 어느 학부모가 아들 편에 보내온 김치였다. 학교에 냉장고가 없었는지 한나절만에 김치가 팍 시어버렸다. 아 그런데 이놈의 김치 맛이 장난이 아니다. 양념이 절묘하게 되어 있었다. 원래 반찬 가지수 많은 거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이 김치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반찬이 될 정도다. 밥에 비벼 먹기도 하고, 오늘은 비빔국수에도 넣어 먹었다. 얼굴 없는 돈보다 이런 촌지가 훨씬 좋다. 무엇보다도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질 않는가 말이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도 그대로 전달이 되고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그 학생의 어머니께 감사 드린다. 김치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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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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