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달인

패밀리 2006. 3. 26. 02:32
결혼하기 전까진 하늘 아래 내가 제일 많이 자는 줄 알았다. 결혼 후 처음에는 어디가 아픈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아님을, 세상에는 정말로 고수가 있음을, 게다가 그 고수가 나랑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아니지만 전성기 때는 나도 잔다면 자는 사람이었다. 맘만 먹으면 하루 열 세 시간 정도는 거뜬하게 자 주고, 주말에는 난이도 높은 이어자기, 밥만 먹고 드러눕기, 가수면 상태로 누워 있기 등 나름대로는 강력한 초식을 구사할 줄 알았다. 내 잠의 거침 없던 행보가 결정적으로 꺾이게 된 것은 더이상 낮잠을 잘 수 없게 된 까닭이 무엇보다도 크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의 크나큰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도저히 생활이 유지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두통약 쌓아놓고 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요새는 예전처럼 낮잠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안 자는 것과 잘 수 없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전성기 때에도 나의 수면 스타일은 진정한 고수의 풍모는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잠의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얼마나 잠을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잠에 이끌려 다니면 안 된다. 체력 저하로, 몸이 어디가 아파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는 이들을 잠의 달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진정한 달인은 자신의 의지로 잠을 조절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잠에 관한 한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아내는 그런 면에서 진정한 잠의 달인이다. 우선 잠의 절대적인 양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잠에 대한 지배력 또한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보아온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우선 낮잠을 잤다고 해서 밤잠을 이루는 데 문제가 되는 적이 없다. 낮잠은 낮잠일 뿐, 그것이 감히 메인 이벤트를 방해할 수는 없다는 거다. 물론 잠을 많이 자는 것만으로 내가 아내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잠을 적게 자야만 할 때엔 확실히 조절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이후로 난 늦잠 때문에 지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나로서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다.

오늘도 아내는 딸이랑 낮잠을 두 번이나 잤다. 처음엔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두 시간을 잤다. 이 정도는 거의 정석 플레이다. 집에서 딸이랑 놀아줄 때의 기본 코스는 오전 오후 두 시간씩 두 번 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두 번째 낮잠에 들었는데 저녁 7시가 되어도 두 여자가 일어나질 않는 것이다. 밤 8시가 되어도 기척이 없었을 때엔 오늘 빨래 털기 놀이를 하느라고 피곤해서 그러나 보다 했다. 결국 밤 9시가 되었을 때엔 배도 고프거니와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슬며시 들어 두 여자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제서야 일어나는 아내. 무려 네 시간을 자 버렸다. 아니 이 아줌마는 배도 안 고픈가...

나라면 이런 날은 밤에 잠을 못 잘 법도 하건만 역시나 아내는 끄떡없다. 새벽 1시가 되자 여지 없이 잠자리에 든다. You Win! 좋은 꿈 꾸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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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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