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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락의 조건

그외 2008. 3. 16. 20:48
    30대 초반까지는 아무 거나 먹어도 괜찮았다. 이런 경우 외식의 패턴은 아주 간단한데, 그냥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프다 싶으면 주위를 둘러보고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서 먹으면 된다. 그런데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먹는 것에 대해 거는 기대가 달라졌다.

'같은 돈을 내고 왜 이렇게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 돈을 좀 더 주더라도 맛있는 걸 먹어야지.'
'이걸 대체 설렁탕이라고 내놓나. 5천원이 아니라 5백원도 아깝다.'

    그렇다. 이젠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거다. 하지만 어느날 마음을 돌려먹었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위해 움직여주는 건 아니다. 나의 가장 큰 불만은 '내가 찍어서 들어가는 식당 중 열에 아홉은 음식이 형편없다'는 거다. 그런데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가는 식당마다 수준 이하인 것이, 음식에 관한 나의 운이 억세게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특별히 저주 받을 이유는 없었다. 원래 그런 거란다. 이 세상의 식당은 원래 음식 잘하는 한 집과 음식 잘 못하는 아홉집으로 나눌 수 있단다.

    식도락의 길은 멀고 험하다.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외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의 맛있는 집이 알아서 연락해 올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런 식당을 발견할 때마다 메모해 놓고, 교통편도 알아놓고, 주위의 식도락가들에게 틈나는 대로 그런 집을 물어 나름대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겐 아직 그쪽 세계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다. 친구 따라, 선배 따라, 또는 우연히 맛좋고 분위기 깔끔하고 가격도 착한 집을 발견하면 뭐하나. 다음에 우리 가족끼리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도통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식도락으로 가는 길이 단지 맛집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장모님 생신 잔치를 했다. 처가는 부모님 생신 때 특별한 것은 없지만 네 딸이 모여 식사는 반드시 한다. 이제껏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식당에서 돼지갈비만 먹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막내딸에게 식당을 알아보라고 했더니 의욕적으로 오리고기집을 예약했다. 첫째딸 우리 부부와는 달리 막내딸 부부는 요런 방면으로 꽤 강하다. 여행, 운동, 맛집 등등 내 기준으로는 아주 멋지게 산다.

    아무튼 오늘의 메뉴, 오리고기는 아주 괜찮았다. 광릉수목원 근처 국도변에 나 있는 호박오리고기 집이었다. 호박도 맛있고 오리고기도 평소 내가 알고 있는 그런 맛이 아니다. 정말로 굿 초이스. 장인도 돌아오는 길에 오늘 식사가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에게 여기 또 오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절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아직 한 시간 식사를 위해 서너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할 정성이 없다. 광릉수목원에 다녀오기 위해 소요된 시간이 오전 11시 30분에서 오후 5시 30분, 즉 6시간이다. 맛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험난하다. 막내딸 부부는 맛있는 걸 먹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우린 전혀 아니올시다. 이런 곳은 알아도 안 간다. 그 시간에 집에서 라면 끓여먹고 TV 보면서 뒹굴뒹굴 하는 게 훨씬 윤택한 삶 아닌가?

    역시 식도락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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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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