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원래 날씨가 좋으면 둘째 딸 걸음마를 시키러 동네 아파트 놀이터에 가기로 했었는데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여 다음에 가자고 했었다. 그런데 선풍기 바람을 쐬었더니 머리가 아픈데다가 때마침 두통약이 다 떨어졌길래 운동도 하고 그 김에 약도 사 오려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걸 본 애들 엄마가 지금 비가 그쳤으니 다함께 놀이터에 가자고 해서 갑작스럽게 온가족이 출동하게 되었다.

16개월 난 아기에게 사실 따로 걷기 연습이 필요한 건 아니다. 지금도 잘 걷는다. 그런데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은 다들 열심히 걷는데 우리 딸은 좀처럼 걸으려 하지 않는다길래 따로 연습을 시켜서라도 걷기에 재미를 좀 붙여주려는 것이다.

해가 쨍한 날보다 이렇게 흐린 날이 오히려 외출하기엔 더 좋다. 둘째를 유모차에 태워 갈까 하다가 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오늘 외출의 취지를 살려 그냥 가기로 했다. 중간에 애가 힘들어하면 그때마다 잠깐씩 안아주면 되지 뭐. 큰 딸은 놀이터에 간다니까 미끄럼틀 탄다고 신났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오늘 계속 비가 내려서 미끄럼틀이 젖었다. 물론 옷을 버릴 요량으로 나갔기 때문에 타긴 탔는데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동생은 언니가 타는 미끄럼틀 당연히 자기도 탈 수 있다며 나섰다. 그러나 어린이집의 실내 미끄럼틀과는 달리 쉽지 않다. 지금 신고 있는 샌들로는 그 경사를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하늘어 어두워지더니 이내 비를 뿌린다. 우산도 없이 나왔는데 어쩌나. 놀이터 옆으로 비를 피할 공간은 충분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래선 집에 갈 수 없다. 엄마 아빠가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동안 딸들은 밖에서 보는 비가 반가운 눈치다. 심지어 둘째는 비 맞는 게 더 좋은지 거침없이 나선다.

지나가는 소나기였는지 비는 10분도 안 돼 그쳤다. 빨리 집에 돌아가려 했으나 큰 딸은 좀 더 놀고 싶은가 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또 언제 다시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애들이랑 엄마는 집에 보내고 약국에 들러 두통약을 사려 했는데, 젠장... 주머니에 있는 돈이 부족하다. 주말에 머리 아파도 그냥 참으라는 얘긴가 보다.

이 이야기의 비극적인 결말. 빈 손으로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지갑 뒷편에 천원 짜리 지폐가 한 장 더 있다는 사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 법이다. 머리 아파도 싸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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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잘, 게보린

롤플레잉 2010. 1. 28. 22:05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결과는 당연히 상대방의 오해, 그리고 언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때가 많지만, 알량한 자존심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설령 인정한다 하더라도 한 번 뱉은 말이 아예 없었던 것이 될 수는 없고, 따라서 어색한 기류가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대인관계 속에서의 말실수만큼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실언들도 있다.

거의 20년 가까이 만성두통으로 살아온 사람이 갖추어야 할 상비약이 바로 두통약이다.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사리돈을 이용했고, 그 후에는 타이레놀, 펜잘을 거쳐 지금은 게보린을 쓰고 있다. 그렇다 '두통엔 게보린, 한국인을 위한 두통약 게보린' 말이다. 게보린이 다른 약에 비해 특별히 좋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근거에 의한 것인지, 혹은 그냥 주관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약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약효가 떨어지는 때가 온다. 그 때가 바로 두통약을 바꿔 줘야 하는 시점이다. 지금 쓰고 있는 게보린도 언제 어느 때에 더이상 효과를 못 볼지 모른다. 그 때엔 또 다른 약으로 갈아타야겠지.

암튼 가지고 있던 약이 다 떨어져 집 앞의 약국에 갔는데, '게보린'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는 너무도 당당하게 '펜잘' 주세요 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약사는 '펜잘'을 내밀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 때까지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속으로 '아니... 새로운 겉포장이네...' 라고 생각하고 덥썩 약을 받아들고 집에 왔다. 그리고 포장을 뜯고 약을 입에 털어넣기 전에 가만히 살펴보니 이게 게보린이 아닌 거다.

'뭐야 이거. 게보린이 아니잖아.'
'어라, 펜잘이네.'
'이런 염병할... 잘못 말했다.'

이미 포장을 뜯었으니 바꾸러 가긴 글렀다. 아니다. 사실 포장을 안 뜯었어도 바꾸러 가진 않았을 거다. 그렇게 자신있게 '펜잘 주세요' 라고 외쳐놓고 이제와서 잘못 사갔다고 할 수가 있겠나. 에라 모르겠다. 그냥 두 알씩 먹자...

애정 없이(?) 산 약이라서 그런지 펜잘은 두어 번 먹고 나서 나머진 어딨는지 모르겠다. 아마 어느 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이사갈 때 기어나오리라...

요새는 젊은 사람도 치매에 걸린다던데 혹시 이런 게 계속되면 그렇게 되는 건가? 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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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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