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수면은 노력이 아니라 체질이라는 기사가 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굳이 기사를 통해 하는 것을 보면, 소위 '부지런한 놈들'의 압박이 심하긴 한가 보다.

매일경제: <4시간 수면은 노력이 아니라 체질>

    이제껏 살면서 4시간만 자고 버텼던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고3때이다. 사실 그 때는 그것이 형벌인지 몰랐다. 그 당시 두 달에 한 번씩 링거 주사 맞고 버텼지만 남들 다 이렇게 하는 거니까 나도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먹었어도 몸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아마 대학 생활 동안 그렇게 대책없이 잤던 것은, 고3 시절의 반대급부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지런한 놈들은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게 올바른 거라고. 부지런해야 경쟁에서 한 발 앞서갈 수 있다고. 그런데 그 놈들이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4시간만 자는 모든 사람이 그놈의 경쟁에서 남들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한 남들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면서 부모 잘 만나 아무 걱정 없이 잘 사는 놈들은 대체 어찌된 일인지 설명 가능해야 한다. 하루 3시간만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종일 고물을 모아도 손에 5천원밖에 못 쥐는 노인들이 대체 뭐가 잘 못 되어서 부자가 못 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혹시 맹목적인 근면은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부동산 투자 하나쯤은 해 주는 센스가 없어 그렇다고 말하고 싶나?

    좋다. 인간이 4시간만 자고도 멀쩡하게 살 수 있다고 치자. 그럼 행복한가? 최소한 나는 불행하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부지런한 놈들, 너네들이나 그렇게 살거라. 아니,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놈들 혹시 부지런한 게 아니라 단순히 잠이 없는 거 아닌가? 그냥 병 아닌가?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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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OOO은행입니다. 항상 저희 은행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요?"
"예, 고객님은 저희 은행을 오래 전부터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뜻으로 신용카드를..."
"그럴리가요. 전 그 은행이랑 거래한지가 꽤 되는데요."
"아뇨, 고객님은 지금도 통장에 잔고가 있으시고..."

    좀 이상하다. 분명 OOO은행에 계좌를 개설해 놓은 것은 맞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월급통장으로 7~8년 전에 만들었다. 하지만 그 회사를 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래를 끊은지가 벌써 몇 년 되었다. 계좌를 아예 없애는 게 좋겠지만 그놈의 귀차니즘이 발동하여 미처 못했나 보다. 근데 잔고가 남아 있다고? 에이, 있다고 해 봐야 몇 백원 정도일텐데. 아니 혹시라도 몇 만 원 남아 있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나? 그렇다면 횡재다. 그야말로 아내의 레이더망을 벗어난 비자금 아닌가.

"전 그 통장 안 쓴 지가 몇 년 되거든요. 그리고 잔고가 있단 말예요?"
"예, 그렇습니다."
"얼마나 남아있는데요? 확인해 줄 수 있어요?"
"예, 확인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확인해 주세요."
"아, 그건 제가 그냥 확인할 수는 없구요, 고객님 주민번호 뒷자리를 말씀해 주시면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예? 주민번호요? 전화 상으로요? 그럼 됐어요. 확인 안 할래요."
"그럼 고객님 신용카드는..."
"아니, 그 통장 안 쓴다니깐요. 신용카드는 무슨..."
"예, 알겠습니다, 고객님. 앞으로도 저희 은행을 많이 이용해 주시고..."

    이렇게 전화를 끊었다.
    아니, 내 통장에 잔액이 남아있다고 할 땐 언제고 그걸 확인해 달라고 하니까 딴 소리인가. 카드 영업에는 본인 확인이 필요 없고, 은행 업무에는 필요하다는 건가? 그쪽에 뭔가 정보가 있으니까 나한테 전화를 했을 거 아닌가.

    내가 언제 어느 지점에서 계좌를 개설했는지 등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새 급증하고 있다는 보이스피싱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의 영업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요새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가 어디 한 두 건인가. 그런 사기는 조심해야 한다면서 은행은 버젓이 그 사기꾼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영업을 하면 어쩌라는 건가. 전화상으로 개인정보를 불러달라고 하다니. 자기들은 물론 안전하게 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민번호 운운하는 순간 신뢰가 팍 떨어진다.

    당신들 돈 많이 벌었잖아. 제발 안전하게 인증할 수 있는 멋진 방법 좀 찾아 봐라. 그게 고객을 위한 진정한 서비스 정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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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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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오늘 일간지의 만평이 일제히 나왔다. 다른 신문들은 평소 그 신문의 정체성으로 미루어 보아 그럴 만하다 싶은 만평을 내었다. 그런데, 한겨레의 만평은 이게 뭔가. 네살 짜리 우리딸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어보면 '애걔, 이게 모야?'
한겨례 그림판: 2008년 2월 26일자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보여주었던 신문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살인마', '코르시카의 아귀'에서 시작하여 '폭군'으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나폴레옹이 파리 근처까지 다다르자 '보나파르트'로 바뀌고, 결국은 '황제'라 칭하기까지... 조선일보의 때아닌 강성 분위기는 물론 그 본심이 이명박과의 힘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초반 기선 제압용이겠지만, 그나마 그런 기세도 없는, 이런 평소답지 않은 모습의 한겨레는 대체 뭔가. 동방예의지국에서는 처음엔 원래 이렇게 웃으면서 시작해야 되는 건가? 정말 약하다 약해.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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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정치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는 나로선 최대한 그쪽 얘기 안 듣고 살고 싶지만, 요새 세상이 어디 그러한가. 눈과 귀를 막고 살지 않고서야, 넘쳐나는 미디어가 매일 쏟아내놓는 엄청난 양의 얘깃거리 중 몇몇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정신건강을 자근자근 헤집어 주는 양아들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출중한 스킬의 소유자가 바로 이재오라는 양아다. 대운하니 뭐니 하는 건 다 빼자. 그런 거 다 갈궈 줄려면 내 청춘이 아깝다. 딱 한마디만 하자.

조인스: "형님, 여성부를 받으셔야 합니다."
조선닷컴: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테니까 형님은 대통령 하쇼."

    그렇잖아도 한국인의 보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정치라는 놈이 이재오를 만나는 순간 '넘버3' 깍두기 수준으로 떨어진다. 형님이라니. 요새 이 양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냥 남들이 얘기해주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제 스스로 '나 명박이 엉아 동생이오.' 하고 떠들고 다니고 있다. 그걸 또 기자라는 놈들은 옳다구나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적고 있다. 아니 그냥 받아적는 정도가 아니라 기자놈들이 나서서 재오를 넘버2로 받들어 모실 작정인가.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끼리 형 아우 하면서 친한 척하면 당장 비난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가족끼리 운영하는 민간 기업이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호형호제하지 않는다. 하물며 정치판에서랴. 둘이 있을 때 이재오가 명박이한테 형님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한들 나랑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니 둘만 있을 때 자기들끼리 저렇게 말을 했다손 치자. 그렇지만 남들 앞에서 얘기할 때엔 저러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돌양아는 대놓고 자기가 넘버1이랑 친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2인자는 나니까 딴 놈들 넘보지 마라'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내가, 대통령은 형님이?' 무슨 깍두기 나와바리 나눌 일 있나? 형 아우 하는 동네에서 그 다음 수순은 무엇이겠는가.

'에이, 형님과 나 사이에...'
'우리가 남이가...'
'형님 제가 아끼는 동생입니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고 있지만, 그들이 정작 그리워하는 것은 저런 측근정치, 패거리정치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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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와, 虛허事로다. 이 님이 어간고.
결의 니러 안자 窓창을 열고 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 이로다.
하리 싀여디여 落낙月월이나 되야이셔
님 겨신 窓창 안 번드시 비최리라.

각시님 이야니와 구 비나 되쇼셔.[각주:1]

-- 송강 정철 <속미인곡>中 --

    송강 정철만큼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기 껄끄러운 인물도 드물다. 학교 다니면서 국어 시간에 접한 송강은 너무나 매력적인 작가이다.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시인. 단순히 우리말로 된 글을 썼다는 사실을 넘어서, 저런 아름다운 말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송강은 조선 최대의 정치숙청 사건인 '기축옥사'의 중심인물로, 그의 두 손에 묻힌 억울한 이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이 사건으로 전라도는 지식인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지금도 호남에선 송강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질 않고, 그저 '철이'라고 경멸적으로 부르곤 한다. 그나마 송강의 문학작품이 없었다면 그가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송강이 살았던 16세기 조선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가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당시의 지식인은 생각은 우리말로 하였으나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한자로 하였다. 송강의 평생지기였던 율곡 이이의 경우를 보면 그러하다. 그가 선조에게 올렸던 '만언봉사'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논설이다. 그의 글에는 왕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선비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율곡 같은 벼슬아치가 벗에게 보내는 편지도 아닌 상소를 순우리말로 지어 올릴 리가 없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국어 시간에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글이 하나 더 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생 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부조화이다. 생각은 우리말로, 글은 한자로. 당시의 이른바 중화사상이 뼛속에 깊이 박힌 유학자들도, 말은 중국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을 썼다는 사실. 당시의 중국은 지금의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세계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종주국이 아니었던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말과 글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 그 이상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은 번역, 통역의 기능을 가지지만, 말은 생각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통역관을 대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두 나라 사람이 대화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할 수 있었다. 필담, 즉 글을 통해 외국인과 서로 대화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중국어는 지금의 영어 이상의 위상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은 물론, 심지어 우리글마저 없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조차도 중국어교육 열풍이 불지 않은 덕택에, 지금의 우리는 우리말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세계에서 홀로 남은 중화국가를 자처하며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강화에 박차를 가했던 조선 후기에, 만약 말까지 중화를 추구하였다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의 양반들이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깔보기는 하였으나 다행히도 말은 중국을 따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서, 송강이 율곡보다 학문이 떨어져서 우리말로 글을 지었을까. 아니면 귀양살이가 너무너무 지겨워서 심심풀이로 외도를 한 걸까. 모두 아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저런 글이 나올 수 없다. 한족 위에 군림한 만주족도 결국 자기 말을 잃으면서 한족에 동화되었다.[각주:2] 한국은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낮은 자세일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데에 이르는 조선시대를 거치고도 우리 민족이 한족에 동화되지 않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 말로 생각해야 되는 거다. 우리의 생각을 다른 나라 말로 하면 더이상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된다.

    훗날 영어가 현재의 지위를 잃고 또다른 말이 세계 공용어로 등장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말로 '각시님, 달은 커녕 궂은 비나 되소서'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1. 옛한글이 안 보이면 네이버사전체를 설치하면 된다. [본문으로]
  2. 만주어는 이제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멸의 위기에 놓여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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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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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인공수정 때문에 불임률이 더욱 높아질 것을 경고하는 기사가 떴다.
    글의 요지는 생식기능에 결함 있는 유전자가 자연도태되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불임률이 올라간다는 얘기다.

    똑같은 얘기를 해 보자.
암치료로 인해 암 발병률 더욱 높아져
아토피 치료로 인해 아토피 환자 더욱 늘어나
희귀병 치료로 인해 희귀병 환자 비율 증가
정신병 치료로 인해 정신질환자 더욱 늘어나
......
    한도 끝도 없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건 아무런 얘기도 안 한 것과 같다. 저들 말대로라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병원에서는 모든 유전적 질병에 대한 치료를 거부해야 할 것 아닌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든 도태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저런 논리라면 유전적 결함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병에 걸리기 쉬운 나약한 유전자를 가진 열등한 사람들은 도태되어야 한다. 옌스 본데, 욘 올센... 저들은 영화 가타카의 이른바 완벽한 우성인자들인가. 저들의 이름에서 풍겨오는 히틀러의 향기, 어째 수상하지 않은가. 나의 이 빌어먹을 선입견이 제발 틀려야 할텐데...

    더욱 한심한 것은 이런 쓰레기를 외신 기사라고 퍼오는 기자들이다. 월급을 받으니 뭔가 일은 해야겠지만 이런 건 좀 아니다. 원글의 수준에 의해 퍼온 사람의 수준도 평가된다는 걸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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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때 대본소에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리를 소재로 한 박원빈의 만화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요새도 만화 그리는지는 모르지만 한때 하드보일드 깍두기 만화로 유명했던 그 박원빈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만화 자체도 그다지 감명 깊을 리 없는고로 전체 줄거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머릿속에 한 장면이 뚜렷이 남아있다. 공간적 배경과 주인공은 박원빈 류의 만화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일본과 제일동포다.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요리사 세계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제일동포의 삶을 그린 만화였던가. 아무튼 주인공은 일본 최고의 요리사인 일본인 스승 밑에 들어가서 테스트 과정을 거치고, 그 밑에서--박원빈 만화가 늘 그렇듯이--주인공만 없었으면 멀쩡히 행복한 삶을 누렸을 일본인 라이벌과 경쟁하며 요리 수업을 받는다.

    어느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각자 제일 자신 있는 일품요리 하나씩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이 때 우리의 주인공이 만든 것이 잉어탕인데, 그 때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조밥을 지어 잉어탕과 함께 내놓았다. 스승이 왜 쌀밥이 아닌 조밥을 지었냐고 묻자, '그냥 잉어탕에는 조밥이 어울릴 것 같아서 지어보았습니다.'라고 말한 주인공. 스승의 입에서 감탄과 함께 칭찬의 말이 쏟아졌다. '역시 자네는 천재야 천재. 잉어탕에는 조밥이 제격이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아도 감으로 알아내다니...' 역시 결론은 주인공이 하늘이 내린 잘난 놈이라는 거다.

    아니,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글이 이렇게 옆길로 샜는지...
그렇다. 잉어탕에 조밥이 어울리는 것처럼, 즉 요리에도 궁합이 있는 것처럼, 특정 사건에도 자주 쓰이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요사이 현장검증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주 생소한 말은 아니지만, 2008년 들어 근자에 흉흉한 사건들이 많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빈도가 올라갔으리라. 그런데 TV나 신문에 현장검증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거의 반드시, 마치 바늘 가는 데에 실 가듯 따라오는 말이 있는데 바로 '태연히'라는 말이다.
현장검증에서 피의자 OO씨는 태연히 범행 과정을 재연하였습니다.
피의자 OO씨는 태연히 범행 과정을 재연한 뒤에...
모자에다 마스크를 쓴 OO씨는 범행 일체를 태연하게 재연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말은 아마도 '담담하게', 또는 '묵묵히'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아마도 시청자나 독자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에 이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파렴치한 범인--엄밀히 말하면 피의자 또는 용의자--이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범행을 재연하였다는 얘길 들으면, 누가 분노에 떨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좀 그렇다. 아니, 현장검증을 태연하게 하지 않으면 대체 사람들은 범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그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통곡이라도 하라는 걸까. 현장검증은 이미 범행의 순간이 아니다. 범인이 체포되어 조사 받는 과정에서 이미 몇 번은 되풀이하여 얘기한 것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범행 순간의 긴박함이 있다면 몰라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범인들이 현장검증시에 보일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수사에 대한 협조와 이후 공판 결과의 함수관계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을까.

    사실 현재의 현장검증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행 검증 방식은 사건이 벌어진 곳의 주민들이 주욱 둘러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게 과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인가. 물론 여기서 피의자의 인권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현행 방식은 마치 북한의 공개 즉결처분과 같은 분위기 아닌가. 어차피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을텐데 꼭 그렇게 한 장소에 다같이 모여서 분노를 표출해야만 하는 걸까. 마치 ritual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도 답답한 일이지만...

    태연한 현장검증,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아니면 기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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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어디에

뷰파인더 2008. 2. 17. 14:08
    장화홍련, 콩쥐팥쥐,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 신데렐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화 속에는 아빠가 없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이제 망할 놈의 아빠가 숨어버린 또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딸 키우는 입장에서 숭례문 방화사건보다 몇 배는 더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울산의 영진군 실종 사건이다. 어이없게도 아이를 죽인 범인은 실종 신고를 한 계모였다. TV속에서 아이를 찾아달라고 울먹이던 모습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또한 체포된 후에는 기껏 한다는 말이 '때려서 미안하다', '죽을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때렸을 뿐이다' 등으로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인간으로 저럴 수 있을까...

    근데 며칠 동안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나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사건 당일 돈 벌러 집을 비워서 알리바이가 확실하다는 그 아빠라는 작자에 대해 경찰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설마 영진군의 아빠라는 사람이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평소 동네 주민들과 유치원의 교사도 다 알고 있었다는 계모의 폭력을 아빠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될까? 그냥 자식이라고 싸질러 놓으면 그게 아빠의 소임을 다한 것인가? 이건 무관심한 아빠 정도가 아니라 최소한 이 사건의 공범이라과 봐야 옳다.

    드디어 영진군의 생모까지 나와 울부짖는 마당에도 이놈의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최소한 그놈의 심경이라도 물어봐줘야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을 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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