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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16 올여름에 맺힌 것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나기 힘들다. 1994년을 제외하면 이렇게 더운 여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체감하는 날씨가 그렇다는 거다. 우리 딸이 어른이 될 때쯤이면, 여름 날씨가 우리 부부 신혼여행 갔던 태국의 날씨처럼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방콕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밟고 공항 바깥 문을 나서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름 나기가 예년에 비해 더욱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중에는 아마도 먹는 것에 대해 맺힌 게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여름철 음식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반드시 먹어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냉면, 팥빙수, 그리고 수박이다. 다른 건 옵션이지만 요 세 가지는 필수 항목이다. 그런데 올 여름 무슨 마魔가 끼었는지 이 세 음식에서 성공한 기억이 단 한 건도 없다. 우선 팥빙수는 어찌된 일인지 먹을 기회가 없다. 오며가며 한 번쯤은 먹을 기회가 올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팥빙수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방금 전에 팥빙수를 노리고 할인마트에 다녀왔는데, 아니 팥빙수 안 파는 맥도날드가 있는 줄 몰랐다. 팥빙수 달라고 했더니 점원이 하는 말이,

"손님, 여긴 팥빙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요? 맥도날드에 왜 팥빙수가 없어요?"
"손님, 여긴 원래 안 팔았습니다."
"이런 썩을..."
이 무더운 여름 내내 먹어본 팥빙수라고는 지난 일요일 조카 돌잔치에 가서 먹어본 게 전부인데, 그나마 그것도 전문적인 빙수가 아니라 얼음 가는 기계 하나 덜렁 갖다 놓고 알아서 소스를 쳐 먹으라는 것이었는데, 팥빙수라는 게 보기보다 쉬운 음식이 아니었다. 어찌해도 제 맛이 나질 않는 거다. 소스를 조금 많이 넣으면 달아서 못 먹겠고, 얼음을 조금 많이 넣으면 완전 맹탕이고... 그래서 결국 올여름 팥빙수는 완전 실패다.

    냉면도 팥빙수 못지 않게 실패한 종목인데, 팥빙수의 경우처럼 먹어볼 기회조차 원천 봉쇄된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앞 분식점(물론 지들은 분식점 아니고 전문 식당이라 우기지만 내가 보기엔 딱 분식점이다. 빙하냉면... 상호부터 벌써 웃기지 않은가 말이다.)에서 두어 번 먹어 본 게 전부다. 그러니 어디 맛이 있겠나. 온면이 아니라는 뜻에서 냉면인 거지, 맛으로 본다면 냉면이라 할 수도 없다. 그나마 방학 이후에는 입에 대 보지도 못했다. 아, 이렇게 우울하게 여름을 보낼 수는 없다.

    팥빙수와 냉면을 먹을 기회가 봉쇄된 것에는 아무래도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어차피 집에서 먹을 수는 없고 외식으로 먹어줘야 되는 종목들인데, 올여름엔 외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마누라가 이번 방학 내내 연수를 받느라 부부 동반 외출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좋다. 이 두 종목은 그렇다 치자. 그럼 수박은 어떠한가. 나를 정말로 우울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팥빙수와 냉면이 아니라 수박이다. 수박은 집에서 먹을 수 있잖은가 말이다. 올여름 수박을 안 먹어봤냐고? 아니다. 꽤 많이 먹었다. 다만 제대로 된 수박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거다. 아니 나한테 대체 무슨 수박의 저주가 내렸길래 걸린 수박마다 이렇게 꾸준히 실패하는가 말이다. 올해 내 손으로 골랐건 남이 골라주었건 관계 없이 맛있게 익은 건 하나도 없었다. 열어보면 죄다 너무 늙어서 흐물흐물하거나 빨간 속살이 무색할 정도로 당도가 떨어지는 놈들 뿐이다. 올해 날씨가 이렇게 안 좋았단 말인가. 아무튼 실패가 계속 쌓이다 보니 더이상 수박을 살 생각도 없다. 아까 다녀온 할인점에서도 마누라가 수박 사지 않겠냐고 했을 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 누가 맛있는 수박을 사서 나한테 연락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어디 맛있는 수박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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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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