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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9 속미인곡, 그리고 영어교육
어와, 虛허事로다. 이 님이 어간고.
결의 니러 안자 窓창을 열고 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 이로다.
하리 싀여디여 落낙月월이나 되야이셔
님 겨신 窓창 안 번드시 비최리라.

각시님 이야니와 구 비나 되쇼셔.[각주:1]

-- 송강 정철 <속미인곡>中 --

    송강 정철만큼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기 껄끄러운 인물도 드물다. 학교 다니면서 국어 시간에 접한 송강은 너무나 매력적인 작가이다.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시인. 단순히 우리말로 된 글을 썼다는 사실을 넘어서, 저런 아름다운 말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송강은 조선 최대의 정치숙청 사건인 '기축옥사'의 중심인물로, 그의 두 손에 묻힌 억울한 이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이 사건으로 전라도는 지식인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지금도 호남에선 송강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질 않고, 그저 '철이'라고 경멸적으로 부르곤 한다. 그나마 송강의 문학작품이 없었다면 그가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송강이 살았던 16세기 조선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가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당시의 지식인은 생각은 우리말로 하였으나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한자로 하였다. 송강의 평생지기였던 율곡 이이의 경우를 보면 그러하다. 그가 선조에게 올렸던 '만언봉사'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논설이다. 그의 글에는 왕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선비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율곡 같은 벼슬아치가 벗에게 보내는 편지도 아닌 상소를 순우리말로 지어 올릴 리가 없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국어 시간에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글이 하나 더 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생 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부조화이다. 생각은 우리말로, 글은 한자로. 당시의 이른바 중화사상이 뼛속에 깊이 박힌 유학자들도, 말은 중국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을 썼다는 사실. 당시의 중국은 지금의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세계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종주국이 아니었던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말과 글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 그 이상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은 번역, 통역의 기능을 가지지만, 말은 생각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통역관을 대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두 나라 사람이 대화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할 수 있었다. 필담, 즉 글을 통해 외국인과 서로 대화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중국어는 지금의 영어 이상의 위상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은 물론, 심지어 우리글마저 없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조차도 중국어교육 열풍이 불지 않은 덕택에, 지금의 우리는 우리말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세계에서 홀로 남은 중화국가를 자처하며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강화에 박차를 가했던 조선 후기에, 만약 말까지 중화를 추구하였다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의 양반들이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깔보기는 하였으나 다행히도 말은 중국을 따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서, 송강이 율곡보다 학문이 떨어져서 우리말로 글을 지었을까. 아니면 귀양살이가 너무너무 지겨워서 심심풀이로 외도를 한 걸까. 모두 아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저런 글이 나올 수 없다. 한족 위에 군림한 만주족도 결국 자기 말을 잃으면서 한족에 동화되었다.[각주:2] 한국은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낮은 자세일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데에 이르는 조선시대를 거치고도 우리 민족이 한족에 동화되지 않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 말로 생각해야 되는 거다. 우리의 생각을 다른 나라 말로 하면 더이상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된다.

    훗날 영어가 현재의 지위를 잃고 또다른 말이 세계 공용어로 등장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말로 '각시님, 달은 커녕 궂은 비나 되소서'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1. 옛한글이 안 보이면 네이버사전체를 설치하면 된다. [본문으로]
  2. 만주어는 이제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멸의 위기에 놓여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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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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