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에 아내가 쓰던 수동카메라 FM2.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사용한지 10년도 더 된 물건이라는 말씀이다. 아직도 필름카메라 사용자들에겐 인기가 꽤 높다던데. 예전에 필름카메라를 쓰긴 했어도, 거의 반자동이라 할 수 있는 캐논 AV-1만 써 봤던 나로서는 완전 수동카메라가 불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써 보고 싶기도 했다.

안 쓴지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렌즈에 곰팡이가 폈다. 닦아낸다고 했지만 그것도 겉뿐이다. 렌즈 속은 어쩔 수 없다. 아무튼 카메라 가방 속에 지금은 필름 사업을 접은 코니카의 ISO 200 컬러 네거티브 필름도 두 통이나 들어있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난 건데 이걸로 찍으면 사진이 제대로 나오긴 할까? 필름카메라가 주는 불편한 매력이 이런 게 아니겠나. 찍고 나서 바로 확인해 볼 수 없다는 거 말이다.

그런데 이 무슨 기구한 카메라의 운명인지... 10년 동안 가방 속에서 멀쩡하게 잠자던 놈이 사람 잘못 만나서 한순간에 벼락을 맞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필름을 넣는 거라 익숙치 않은 손으로 버벅대다가 그만 이 묵직한 놈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와작! 하는 소리와 함께 50mm F1.4 짜리 밝은 단렌즈가 그만 테러를 당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렌즈 앞의 UV 필터가 깨진 건데, 문제는 필터 링이 휘어서 렌즈에서 빠지질 않는다는 것. 어쨌거나 이 더운 여름 주말, 온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는 순간에 아빠가 사진을 찍어준다고 설쳐대다가 카메라 하나 말아드시고 거기에 덤으로 유리 파편이 바닥에 튀어서 애들보고 피하라고 난리를 치고... 거실 바닥을 정리하는 동안 정말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 무슨 한심한 사고인지... 하필이면 내 물건도 아니고, 아무리 그동안 안 쓰고 버려두었다지만, 아내의 물건을 말이다. 아내는 물론 괜찮다고 하지만 최소한 유쾌할 리는 없잖은가.

바닥을 쓸고 닦고 카메라를 가방 속에 넣어서 다시 책장 위에 올려 놓을까 하다가, 오늘 다행히 이 사고를 피해간 망원 렌즈로 아내와 딸들 몇 컷 찍어주긴 했다. 실내에서 무슨 놈의 망원렌즈인가 하겠지만 어쩌겠나, 멀쩡한 렌즈가 그놈 하나뿐인 것을... 조리개가 단렌즈에 비해 턱없이 적게 열리기 때문에 빨리 찍을 수도 없어서 나중에 현상을 하면 죄다 흔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왜 그순간 갑자기 필름카메라 생각이 나서 오늘 하루가 이렇게 꼬이는지... 그냥 속편하게 디카로 찍지 무슨 분위기를 잡을거라고... 게다가 망원 렌즈 한 번 들고 나니까 손목이 시큰거린다. 역시 그냥 디카 쓰자.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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