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플레잉'에 해당되는 글 239건

  1. 2006.02.09 가끔은 길을 떠나고 싶지만...
  2. 2006.02.08 무림과 경제활동
  3. 2006.02.05 아저씨와 디아블로
  4. 2006.02.04 어머니들의 꿈
  5. 2006.02.04 좋은 엄마 아빠 되기
  6. 2006.02.02 스냅샷
  7. 2006.01.31 담배 연기
  8. 2006.01.30 밥이 보약?
  9. 2006.01.28 썩은 물 퍼내기
눈이 내리면 하고 싶은 게 있는가. 나는 길을 떠나고 싶다.

이번에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겨울철에 눈 구경 하기 힘든 부산에서는 이때가 특별한 날이다. 해저문 저녁 시간 이후로 바깥 출입을 금하는 비교적 엄격한 가정에서도 눈 오는 날 만큼은 예외가 적용되어, 밤 10시 이후에도 창문 밖에서 'OO야 눈 온다! 나와라!' 라는 아이들의 부름에 들떠 골목으로 뛰어나갈라 치면, "옷 두껍게 입어라.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라..." 정도의 훈계가 보통이다. 내리는 즉시 녹아 버리는 게 보통이라, 이렇게 쌓일 정도로 눈이 오는 밤이면 눈싸움에, 눈사람에 세상은 온통 아이들의 것이다. 이젠 막히는 출퇴근길이나 눅눅해지는 옷가지, 염화칼슘 등의 무드 없는 일상으로 인해 예전과는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눈 오는 날의 로망은 살아 있다.

언제부터인가 눈 내리는 밤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뭔가 모험이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 속에서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한편으론 평온한 삶을 살다가, 어느날 누군가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았던 커다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그런 모험 말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파이널 판타지 VI' 이후인 것 같다. 눈보라를 헤치며 광산 도시 나르셰로 걸어가는 세 사람의 인트로 화면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 이제부터 시작되는 험난한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해낸다.


파이널 판타지 VI의 인트로

예측 가능한 일상의 수레바퀴를 도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렇게 NPC처럼 살다가 늙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대사 몇 마디 없이 마을 안에서만 돌아다니는 NPC...
한번쯤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은 사람이 없겠는가. 우리가 사는 마을에선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의 안녕이 위협받고 있으며, 이 파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이라면 하는 생각 말이다. 나 없으면 세상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이다. 현실에선 나 하나 죽어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지만, 게임 속에서처럼 내가 잘 못 되기라도 하면 바로 '게임오버'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 어드밴스의 오프닝에서도 눈이 내린다.

근데 참으로 재밌는 것은 그렇게 모험을 떠나자마자 바로 그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다시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모험 도중 들른 마을의 주점에 그냥 눌러앉고 싶은 유혹이 밀려오는 것은, 단순히 내 게으름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역시나 세상을 구원하는 일 같은 것은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거창한 일이다. 늘 똑같은 일상을 저주하지만, 막상 그 달콤한 평온함이 깨어지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 봐라' 라고 말하며 한 걸음 다가서는 이 불편함... 가끔 마을이 나타나면 다행이지만 보통은 밥 먹듯이 노숙을 해야 하고,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고, 숨이 멎을 것 같은 사막을 지나야 하고, 심지어는 적이 너무 강한 나머지 경험을 쌓기 위해 지나왔던 곳을 몇 번이나 다시 돌아다녀야 하고... 누군가는 벽 한 쪽에선 난로에 장작이 타오르는 주점에서 오랜 친구들과 한 잔 걸치는 동안, 또 누군가는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려고하는 세력과 숨가쁜 운명의 일전을 벌이고...
멋진 것도 잠시, 곧 피곤하다... 난 애시당초 그냥 주점에 앉아 있다가 모험 중간에 잠깐 들르는 영웅들을 맞아 그들의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어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로맨싱사가2

눈 내리는 그 날 밤 내가 모험을 그리워하고 있을 바로 그 때, 그 반대로 나와 같은 평범한 삶을 그리워하면서, 영웅들이 우리집 앞 골목길을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깨에 걸린 운명을 불평하면서, 따뜻한 음식과 난로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Kids Run Through the City Corner --- Final Fantasy VI

지금 책장에는 '파이널 판타지 X-2'가 오래 전부터 새로운 나의 모험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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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즐겨 보는 무협지, 무협만화의 주인공들이 속한 소위 정파라고 하는 집단은 어떻게 밥벌이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사파 집단은 그래도 어느 정도 경제활동에 대해 서술되고 있다. 청부살인, 납치, 첩보활동 등 그들이 최소한 어떻게 경제 주체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근데 정파는 뭐 먹고 살지?
그나마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표국 호위무사 정도인데, 대개의 무협지에서 그렇듯 표국이라는 노동시장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부족할 뿐 아니라, 비교적 숙련도가 낮은 무술 노동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 경험 있고 숙련도 높은 무술 노동자는 무슨 일을 하는가? 무술도장으로? 그런데 무협지를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지만 무술도장의 수강생(제자)들이 어디 한 번이라도 수강료 때문에 고민한 적 있던가. 이번 달 수강료 밀렸다고 제자들을 다그치는 스승을 본 적 있던가. 그렇다면 무술도장은 기본적으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 사회 봉사 차원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 많은 인간들이 모두 수렵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도 않고... 이도저도 아니면 혹시 시장 상인들로부터 얼마씩 후원을 받는 건가? 흠... 그렇다면 정파들도 나와바리를 관리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제자들이 스승을 사부라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밥 먹다가 별 쓰잘데기 없는 걱정도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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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들은 권력을 갈망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고작 집안 식구들 앞에서만 군림하기 마련이다. 반면 <디아블로>는 누구에게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멋진 신세계다.


선배 수기 아저씨로부터 책 한 권을 받았다. 저자로부터 직접 받는 책은 서점에서 고른 그것과는 확실히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주위 사람들 모두 분발하시라. 몇 권 더 받아 보자...
어쨌거나 약속은 지켜졌다. 2000년에 수기가 쓴 책은 서점에서 사서 보았다. 그 때 한 약속이 그 책을 사서 보면 다음 책은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다. 몇 년이나 묵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지는 사회...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위의 인용은 디아블로에 대한 적절한 논평에도 불구하고 절반만 옳다. 이미 아저씨들은 집안에서조차 추락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 아직까지 용감하게 집안 식구들 앞에서 군림하는 아저씨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내 아버지가 되겠으나, 그 또한 이미 물적 토대는 무너지고 이데올로기만 남은, 그래서 시쳇말로 아무도 먹어 주지 않는, 권력에 대한 미망일 뿐이다.
현실에서 아저씨들은 갈 곳이 없다. 그러니 더더욱 디아블로를 때려 잡으러 칼 한 자루 둘러메고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미 고참 아저씨인 수기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건만, 굳이 책 속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은 혹시 그 또한 아주 조금은 현실의 권력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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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들의 꿈

롤플레잉 2006. 2. 4. 22:57
어깨에 부딪히는 사람들로 미루어 시장 바닥이었을 수도 있지만 장소는 확실치 않다. 나를 뒤쫓는 것은 바로 사복 경찰들이었고, 내달리는 나는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잡힐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나는 용케도 그들의 손길을 살짝살짝 피하며 인파 속을 헤엄쳐 나갔으며, 결국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것이다...
대개가 그렇듯이 어머니들의 꿈은 용한 데가 있다. 아버지들의 꿈에 대해선 아는 바도 없고 들은 바도 없다. 그렇다. 어머니들이다... 자식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밀도에선 아버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차이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위의 내용은 십수년 전 친구 어머니의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의 주인공이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 친구인 바로 나였다. 신기한 일이다. 그 친구 어머니의 꿈은 꽤 정확하다고 알려져 있었던 터라 그 얘기를 들은 나로선 예사롭게 넘길 수가 없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성적 처리 기간은 이미 끝났으며 세 번째의 학사경고를 예상한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들려온 얘기인지라 별 기대는 안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학기에 수강했던 과목의 담당 교수님의 현황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회학과 교양 과목의 교수님이 바쁜 일정으로 인해 성적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로 교수님께 달려갔다. 구차하고 뻔한 핑계과 읍소에 어이없어 하던 교수님은 마침내 순전히 귀찮은 마음에(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며칠을 쫓아 다녔다) 레포트 제출을 허락하셨고, 그렇게 그 학기를 극적으로 패스할 수 있었다.

얼마전 고향의 어머니께서 내 꿈을 꾸셨다 한다. 길을 가다 내가 거름 구덩이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을 어머니가 팔을 뻗어 구해 주신 것이다.
올해는 또 어떤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난 또 어떻게 그것을 헤쳐나갈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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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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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특기 중에 하나가 뒤로 집어 던지기이다. 틈만 나면 옷장 서랍을 열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옷가지를 홱 던진다. 어디 옷장 뿐이랴. 책장의 책도 있는 대로 다 집어선 방바닥에 흩어 놓는다. 그래서 이 녀석이 깨어있을 땐 언제나 방이 폭격 맞은 것 같다. 물론 처음엔 어지를 때마다 뒤를 따라다니며 정리했지만 이젠 완전히 손 놓아 버렸다. 심지어는 재우고 나서도 안 치우고 그냥 놓아둘 때도 많아졌다. 치워 봐야 무슨 보람이 있나. 또 금방 어질러 놓을 것을...

청소의 부담뿐만 아니라 안전사고의 위험 때문에라도 아무 물건이나 아기 손이 닿는 곳에 둘 수는 없다. 혹시 칼이나 가위 같은 물건이라도 집으면 큰일이다. 이러다 보니 원래 낮은 곳에 있던 소품들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 새로운 자리를 잡아간다. 나중엔 어디까지 올라갈지 궁금하다. 만지면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는 서랍은 테이프로 봉해 버렸다. 그나마 이 녀석이 엄마 아빠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힘으로 그 봉쇄를 뚫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항상 관찰의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이러하니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엄청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정말 육아는 힘든 일이다...

육아에 조금이라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어지르는 것이 아기 교육에 훨씬 좋다고. 서랍을 봉해 놓은 것은 비교육적이라고... 누가 몰라서 이러나... 그치만 오죽하면 딸을 부를 때 '백만 스물 하나'라 하겠는가. 반나절만 따라다녀 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우리도 교육적 효과, 즉 딸의 미래와 관련된 것이라면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엄마 아빠의 현재 생활을 기회비용으로 하는지라, 꽤나 피곤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엄마 아빠도 조금은 우아하게 살고 싶은 거다.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닌 거다. 항상 당위적인 것만 좇을 수는 없는 거다.

엄마 아빠 되기도 힘들지만, 좋은 엄마 아빠 되기는 더욱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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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샷

롤플레잉 2006. 2. 2. 09:08
VMware라는 가상 머신은 정말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듀얼부팅을 하지 않고서도 다른 컴퓨팅 환경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덕분에 따로 부팅을 하지 않아도 윈도우즈와 유닉스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이 가상 머신의 기능 중에 또 하나 심금을 울리는 멋진 부가 기능이 있으니 바로 스냅샷 기능이다. 쉽게 말하면 윈도우즈의 대기 모드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사용자가 원하는 순간을 얼려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필요할 때 녹이는 것이다. 컴퓨터 성능이 좋아지면 질수록, 그리하여 프로그램의 실행 속도가 빨라지면 질수록 인간의 참을성은 더욱 없어지게 마련이니, 부팅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한다. 그러니 이 기능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가상 머신을 종료하고 싶을 땐 그냥 스냅샷을 찍어 놓고 나중에 다시 실행시키면 그만이다. 아~ 멋지다 VMware...

가끔은 뇌도 이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며칠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잠이 오려는 순간 어떤 생각이 번뜩하고 지나쳐갔다. 대단한 건 아니고 글로 정리해 보고 싶은 주제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망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메모해 놓을 것인가, 아니면 내일 아침에 정리를 할까 하고. 난 나를 잘 안다. 몇 분 전에 놓아두었던 물건도 못 찾는 건망증의 소유자가 내일 아침에 이 주제를 다시 떠올릴 수 있을까. 두말하면 숨가쁘다. 그러나 그 순간 늘 그러하듯 참을 수 없는 귀찮음이 밀려 온다.
'다시 일어나서 불을 켜고 메모지와 펜을 찾는 일련의 행동이 내 양심에 비추어 용서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아니 멀쩡한 사람이 이런 것 하나도 기억을 못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많은 걸 기억하라는 게 아니다. 그래 키워드... 내일 아침 이 단어 하나만 기억하자. 단어 하나라니깐...'
당연히 이렇게 아무런 근거 없는 무한한 자기 신뢰와 함께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상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일어나자마자 패배감에 물들어 있는 남편 얼굴을 보고 아내가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말시키지 마..."
"왜 그래?"
"아씨~~ 기억이 안 나... 어젯밤에 분명히 몇번을 외고 잤는데..."
"뭔데?"
"몰라... 뭐였는지..."
"종류가 있을 거 아냐... 오늘 해야 되는 일이야?"
"그것도 모르겠어."
"쯔쯔..."
"아 정말... 뭐였지..."

정말이지 이럴 땐 머리 속을 찰칵 찍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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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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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연기

롤플레잉 2006. 1. 31. 23:13

담배를 끊은지 어언 3년 하고도 넉 달이 지났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안 하던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백 배는 쉽다.
어느날 아내와 밖에서 저녁을 사먹고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담배를 끊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루에 최소 한 갑 씩 들어가는 담배값은 세이브될 것 아닌가... 나중에 금연하게 된 이후를 이것저것 만들어 붙여 보았으나, 경제적인 것 외에는 아직도 명쾌한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자리에서 호주머니를 뒤져 반쯤 남은 담배갑과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후, 하늘에 맹세하건데 한 모금의 담배도 입에 댄 적이 없다. 꿈에서 핀 담배는 제외하기로 하자. 어차피 꿈은 내 통제 밖이다. (솔직히 말하지만 담배가 꿈에서 핀 것 만큼 맛있다면 이 금연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담배 끊기가 정말 쉬웠다는 얘긴 아니다. 한달 정도는 괴로웠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건 어디까지나 하던 일을 그만 두는 범주 속하는 것이다. 담배를 끊는 과정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담배를 끊은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였다. 사무실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금방 복도에서 담배를 피고 들어온 모양이다. 담배 냄새가 잠자던 내 온몸의 신경을 깨웠다. 몸 전체가 지릿지릿해지면서 머리가 핑글~ 하고 돌았다. 정말로 참기 어려운 역겨운 냄새였다.

'아니 내가 담배를 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엄청난 냄새를 풍겼단 말인가...'
'구수한 냄새 정도인줄 알았는데 이런 썩는 냄새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맑은 공기를 쐬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금연하기 전에는 비흡연자에 대한 매너는 실내에서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배를 끊고 나서 깨달은 바, 담배 연기는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비흡연자를 괴롭힌다는 거다. 오히려 실내에서는 담배 연기가 싫은 사람을 그 자리를 뜨면 되지만, 바깥에서는 창졸지간에 바람결에 묻어오는 담배 연기에 당하고 마는 것이다. 정말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다. 실외에서 제일 화나는 장소는 횡단보도에 서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이다.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고 꼼짝없이 당한다.
이러다 보니 당구장 같은 곳은 자연스레 발길을 끊게 되었고, 술집도 비좁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곳은 가지 않게 되었으니, 생각지도 않았던 부수적 경제 효과를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 이후로는 좀 더 새롭고 시각적인 이유로 인해 담배 연기를 싫어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문득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까닭이다. 어느날 길을 걷다가 내 앞을 담배 연기를 뿜으며 걸어가는 아저씨를 무심코 쳐다 보았다. 아 근데 그 아저씨 입에서 나온 담배 연기가 내 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저 아저씨의 허파에 머물던 공기가 이제 내 허파로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생각만 해도 우울해지는 거다.
사실 담배 연기가 없다고 해서 이러한 현상이 아예 없는 사실이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사람 모이는 곳에서 숨쉬는 공기를 공유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다만 이런 꼴을 두 눈 뜨고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굳이 이렇게 실험실에서 하듯이 연기를 통해 비주얼하게 확인을 시켜 줘야 한단 말인가.
난 정말 담배보다, 담배 피는 사람보다, 담배 연기가 싫다...


금연하고 세이브한 담배값으로 뭐하냐고?
모른다. 이놈의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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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보약?

롤플레잉 2006. 1. 30. 23:21

결국 한의원에 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 것이다.

사실 나로서도 상당한 위기감이 왔다. 근래에는 딱히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계속 아팠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어김 없이 감기 기운이 찾아왔다. 심지어 집 앞 가게에 다녀와도, 샤워만 해도, 창문만 열어 놓아도, 보일러 전원만 내려도 금새 열이 나고 오한, 두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두통약, 몸살약을 계속 달고 살았다. 마침내 새벽에 몸살과 함께 도적같이 찾아온 속쓰림에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야 병원에 갈 마음이 생겼다.

아내랑 나는 살면서 몇몇 부분에 있어 참으로 잘 맞는 부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말 많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의원행은 처음부터 어긋나 버린 면이 없지 않다. 왜 이리 말이 많은 것이냐. 물론 의사 선생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환자를 마음 편하게 하려는 심산이었겠지만, 그런 의도로 내뱉은 농담이 나랑 아내를 처음부터 기분 확 나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덩치가 좋군요. 한 100킬로는 나가겠는 걸~"
      "연예인 닳았다는 소리 못 들었어요? 누구더라~ 아 생각났다. 김제동!"
      '이 인간이 어딜 같다 붙이는 거야... 쩝...'
가뜩이나 불어나는 체중에 예민해져 있는 내게 100킬로라니. 무슨 저주도 아니고... 그리고 누구? 김제동? 길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면 드잡이를 놓을 수도 있는 도발 아닌가...

시작이 이러하니 문진이 어찌 되었겠나. 나름대로 의사 선생은 적극적으로 상태를 물었지만 환자가 퉁명스럽고 짧게 딱딱 끊어 대답을 하니 진도가 제대로 나갈 리가 없다.
       "근데 부인이 남편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 이렇게 창백한 걸 봐..."
       "예? 그럴리가요. 전 아픈 데 없어요."
       "맞아요. 이 사람이 얼마나 건강한데요."
       "아녜요, 아녜요. 겉으론 건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깡으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푸훗... 깡으로요?"
건강하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아내까지 보약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와서는 부부가 거의 의사 선생을 장사꾼 정도로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내가 환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오늘 여기서 아무런 소득 없이 일어서면 또 날을 잡아서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게으름으로는 하늘이 내린 궁합인 우리 부부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여서 결국은 약을 지어서 먹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의사 선생이 내린 나의 상태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껍데기만 남고 속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즉 기름 없이 굴러가는 자동차 정도로 비유하면 되겠다. 체력, 기력, 양기 등등 컨텐츠라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안 남아 있단다. 맥도 잘 안 잡히는 수준이라나 뭐라나... 뭐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보약 한 재 지어 먹으라는 얘기였다. 물론 의사 선생 본인은 이 처방이 보약이 아니라 치료약이라고 강조했지만 멀쩡한 사람이 아무리 들어 봐도 그걸 지칭하는 우리나라 말은 보약 말고는 없는 듯했다.
       "근데 여기다가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면 녹용을 쓰면 좋아요..."
       "아... 그런가요?"
       "녹용을 쓰면 짧은 시간에 몸이 화악~ 올라오지..."
녹용이 부스터나 스팀팩 정도 되는 모양이다.
       "근데 녹용을 쓰면 약값이 좀 올라가지."
       "얼마나 올라가는데요?"
       "녹용 안 쓰면 20만원, 쓰면 한 4~50만원..."
       "!!!..."
대번에 환자 인상이 험해지는 것을 보더니 바로 말이 바뀐다.
       "일반 약재도 효과 좋아요..." 
       "..."

우여곡절 끝에 20만원을 주고 한약을 지어먹었다.
한약은 다 좋은데 먹기가 지랄같다. 입에 써서 힘든 거야 어릴 때 얘기지만, 시간 맞춰서 빼먹지 않고 꾸준히 먹기가 어렵지 않은가... 아무튼 평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도 대견스러울 정도로 이번 약은 잘 먹었다. 복용시 금하는 음식도 가려 먹고 공복이나 식간을 지키라는 지시사항도 그럭저럭 따랐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환자의 이 정도 정성에는 뭔가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응답이 있긴 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곳에서의 응답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몸은 별로 나아진 게 없는데 왜 식욕만 마구 올라오느냐는 거다.
하루 세 끼도 모자라서 밤 12시가 다 되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밥이 땡긴다. 몸 속에 새생명이 자라는 게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는 거다. 혹시 밥이 보약이라더니 의사 선생이 의도한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밥 잘먹고 힘 내라고? 설마 진짜로 100킬로로 만들 생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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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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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물 퍼내기

롤플레잉 2006. 1. 28. 20:30
단 한 줄의 일기도 쓸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게 시간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나서야 그것이 절대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과 같아서 자꾸자꾸 퍼내다 보면 말라 버릴지도 모른다는 핑계도, 이 게으름을 영원히 덮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마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썩어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하여...
급한 마음에 우선 썩은 물을 조금씩이라도 퍼내기로 한다.

어떤 것이 두레박에 걸려 나올지는 현재로선 내 영역 밖이다.
그저 이놈의 게으름을 퍼내고 남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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