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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행이나 외출에 적당한 책이 있게 마련인데, 내게 있어서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책이 그런 것 같다. 이전에는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다. 굳이 먼 거리의 여행이 아니라도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갈 일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에 함께 따라갈 책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다. 그렇다면 여행 또는 외출에 적당한 책의 요건은 무엇인가.

첫째, 가지고 다니기에 적당한 판형이어야 한다. 일단 덩치 큰 책은 탈락이다. 여행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집에서 책상 펴놓고 본다면야 덩치가 무슨 상관이겠냐만, 여행에서는 충분히 결격 사유가 된다. 죽어도 봐야겠다 싶은 책이라면 백팩에 넣어 갈 수도 있으나, 이왕이면 야상 점퍼 주머니나 보조가방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둘째, 내용이 무겁지 않아야 한다. 여행 도중에 굳이 머리에 부담을 주고 싶은 변태들이 있다는 얘긴 들었으나, 나같은 멀쩡한 보통 사람이라면 책읽다가 두통·소화불량에 걸리는 경우는 피해가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 지면이 충격과 경악으로 얼룩진 스포츠신문 같은 찌라시들을 읽을 순 없잖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잠을 청하지.

셋째, 분량이 적당해야 한다. 물론 작은 판형인데도 뚱뚱한 책이 걸릴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분량이 너무 적을 경우다. 혹시 이동 중에 다 읽어버리면 그 다음엔 뭘 할 건가.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한 권 더 챙겨가는 것도 좀 우습다. 고시생도 아니고 무슨 놈의 책을 두 권씩이나… 그렇다. 지금이야 말로 중용이 필요한 때다. 아주 적당한 분량. 소요 시간을 어림잡아 보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읽을 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적당한 분량의 책.

넷째,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반복해서 읽어도 재밌는 책이어야 한다. 봐서 재미없는 책을 대체 왜 읽겠는가. 아무리 활자중독이라고 해도 책읽기가 무슨 숙제도 아닐진데 재미없는 것까지 볼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 요건을 충족하기가 만만치 않다. 재밌는 책이야 많지만, 반복해서 읽어도 재밌으려면 대체 얼마나 재밌어야 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거리를 찾을 수 있게 하는―말이 쉽지 그런 책이 얼마나 있으랴―그런 책이어야 한다. 물리지 않는 밥과 같은 책.

다섯째, 앞의 요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덮었다 다시 읽어도 흐름에 방해받지 않는, 적절한 분량의 단원이나 단락의 구분이 되어 있는 그런 책이었으면 좋겠다. 욕심이 너무 과한가. 아무튼 이런 요건까지 갖추면 너무나도 착한 책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번에 부산 다녀올 때에도 무슨 책을 데려갈까 하고 한참을 책장 앞에서 고민하다가 카이에 소바주 1권이 당첨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역시 괜찮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딸들에게 신데렐라 이야기도 해 주고. 이번 기회에 다시 5권까지 정주행을 할까 말까 잠시 갈등했으나, 다음 기회로 미뤘다. 평소엔 다른 책 보고, 카이에 소바주는 필요할 때 곶감처럼 빼먹지 뭐.

원래는 이번에 읽었던 내용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는데 엉뚱한 길로 빠져 버렸다. 그나저나 외출하는데 이리 거창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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