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기간 중 둘째날에는 거의 언제나 선생님의 특강 시간이 들어있다. 저녁 먹고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내어 답사 코스 중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주제를 보강하거나 학생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에 할애한다. 그런데 이 시간이 사실은 전체 답사를 통틀어 가장 힘든 시간이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 뛰어다니느라 힘을 모두 소진한 데다가, 저녁까지 먹었으니 어찌 졸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본 교수님은 원래부터 수면제로 유명하신 양반이니 이쯤 되면 '죽음의 상승작용'을 일으킬 만하다.

    솔직히 말하건데 나도 이제껏 다녀본 여러 답사 중에서 이 시간에 한 번도 졸지 않은 적이 없다. 역사라는 게 원래 문학에 가까운 학문이다 보니, 저녁 먹고 하는 얘기는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게 되고, 그런 상태로 이십분을 넘어가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고개가 꺾인다. 그런데 학생들이 전멸하는 사태에 이르러서도 선생님은 의연하게(?) 강의를 진행하신다. 마침내 특강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앉아서 코고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이다 보니, 마음 속으로 이런 의미 없는 시간이라면 차라리 없애고 그 시간에 학생들 잠을 재우는 게 다음날 일정을 고려해도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번 답사에도 당연히(?) 이 시간은 다가왔고, 학교처럼 멋진 강의실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저녁 먹은 식당에서 탁자를 한 쪽으로 몰고, 좁은 자리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앞으로 두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나 하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번 답사 코스가 경북지역이다 보니 당연히 안동이 포함되어 있고, 안동 하면 떠오르는 것이 당연히 서원을 필두로 한 양반문화인데, 특강에서 이 주제를 비켜갈 리가 없다. 그런데 선생님이 '양반문화' 얘기가 나온 김에 조선시대 양반 중심의 지배 문화의 변화 과정을 짚어주시겠단다.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코 귀를 열어 두었는데, 아니 이럴수가... 단 한 시간 내에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흐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훑어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붓글씨로 치자면 일필휘지라고나 할까. 그건 한 시간짜리 강의 내용이 아니었다. 한 학기분의 강의 내용을 한 시간으로 압축해서 얘기하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강의 내용 중 어느 하다도 버릴 것이 없었다. 무심코 메모장에 내용을 끄적거리던 3학년들, 황급히 강의를 녹음할 수 없나 하고 둘러봤지만 아쉽게도 아무도 준비하지 못했다.

    조선시대가 워낙 이 선생님의 전공과목인지라, 어느 정도 짐작을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압축해서 얘기할 수 있다니. 나 아닌 누군가가 특정 주제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부럽지만, 이렇게 자신의 컨텐츠를 멋지게 압축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배가 아플만한 재주임에 틀림 없다.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학생 수가 적어서 조선시대에 대한 강의 하나가 폐강되었는데, 그 아쉬움을 한 시간 안에 다 푸신 걸까...

    물론 선생님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번 강의만 다른 때와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제껏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기본 내공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번 특강 시간에 대부분의 3학년들은 내가 받았던 감동을 공유했으나, 1-2 학년들은 여전히 졸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런 깔끔한 압축기술은 언제 보아도 배아픈 일이다.

    하긴, 선생님은 이 주제에 대해 평생을 연구해 왔는데 난 달랑 책 몇 권 보고 저런 걸 흉내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 억울할 필요는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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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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