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특급'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2.22 기억의 진실

기억의 진실

롤플레잉 2008. 2. 22. 16:32

    나에게는 가까운 과거의 일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아주 먼 과거의 일들은 잘 기억해내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 이러한 능력을 그간 스스로도 신통하다고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어떤 계기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기억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보았던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의 기묘한 이야기들은 어린 나의 상상력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혹시라도 그 시간에 아버지가 채널을 독점하기라도 하면, 요즘처럼 케이블에서 재방, 삼방, 마르고 닳도록 다시 틀어주는 것도 아니라서 머리를 쥐어뜯곤 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마치 불도장을 찍어놓은 것처럼 강한 인상을 남겼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네를 타는 여자아이의 영혼, 그리고 그 아이의 곰인형이 나오는 그런 스토리였다. 시리즈의 다른 편보다 약간 무섭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아이의 영혼이 그네를 타는 장면과 그 곰인형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서, 지금껏 그 곰인형을 떼어놓고서는 '환상특급'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환상특급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당연히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편을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당시 TV 방영시 소제목을 달아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껏 그 제목까지 기억하는 것은 무리다. 아무튼 곰인형 편을 찾기 위해 시리즈의 개요를 훑어보았는데, 이게 어인 일인가. 쉽게 찾으리라 예상했으나 맘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시리즈 전체를 무작정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빨리 내가 원하던 것을 찾았다. 그런데...

    소제목은 'If She Dies'였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딸,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노력, 고아원에서 죽은 여자아이의 영혼 등... 20년도 더 지나 잊혀졌던 장면들이 다시 재구성되어 퍼즐을 맞추듯이 연결되는 건 좋았는데... 그런데 스토리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던 그 곰인형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곰인형은 생김새부터가 많이 달랐다. 또한 여자아이의 영혼도 그렇고, 그네를 타는 모습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스토리도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결론적으로 내 기억과는 아주 많이 다른 스토리였다.

'아니 이게 이런 얘기였나?'
'쟤가 그네를 저렇게 탔었나.'
'어허, 곰인형이 그 곰인형이 아니네...'

    끝까지 보고 난 후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맞다. 결정적인 증거는 그 고아원의 수녀님인데 이것은 내 기억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은 아주 많은 곳에서, 그리고 특히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던 부분에서 잘못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덜 무서운 내용이었다. 난 내 마음대로 스토리와 등장인물의 모습 등을 재구성하고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스스로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재구성되는 것 같다. 이건 아주 고마운 능력인데, 잊고 싶은 기억을 의식 저편으로 감추고, 좋았던 기억을 더욱 좋게 꾸미고, 좀 더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하여,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고, 이 드라마가 자신의 컬랙션이 되는 것이다. 필요할 때 손을 뻗어 펼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드라마. 인간이 기억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이 내 각별한 기억력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틀림 없지만, 한편으로 내 마음대로 편집이 되더라는 면에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기억이나 나에게 불리한(?) 기억들도 나중에 좀 더 멋지게 편집되지 않을까.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권리이므로, 나 말고 다른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면 내가 구성한 역사만 남는 것이다.

    공포물은 물론 약간의 기괴함도 용서할 수 없는 아내는 '환상특급'이라면 손사래를 치는고로 나 혼자 보았는데, 다 보고 나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햇빛 쏟아지던 날들'이라는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왠지 따분해 보여서 관심조차 두질 않았던 영화인데 시간 내서 봐야겠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세방을 구하다  (3) 2008.03.03
새로운 야식 메뉴, 스파게티  (2) 2008.02.26
꿈의 순기능 - 꿈 이야기 1  (0) 2008.02.18
오프라인  (0) 2006.05.08
한 시간 일찍...  (0) 2006.05.02
Posted by 도그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