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조직생활에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랫사람들, 동료, 윗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과 더 원만하게 지내십니까."

"타고난 성격이 좋아서 모두와 잘 지낸다"는 등의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지만, 초면에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못 지내는 모난 성격이라고 할 것까진 없잖은가. 그래도 이제껏 살아왔던 것을 돌이켜 그 경중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나는 윗사람보다는 동료, 아랫사람과의 관계를 잘 풀었던 것 같다. 뭐 그렇다고 해서 윗사람들에게 항상 들이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살면서 참 안 되는 것이, 그 사람이 나보다 직급이 높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의 뜻에 따를 것을 강요당하는 일이다. 직장생활을 때려치고 교사가 될 생각을 했던 데에는 사실 이런 부분도 크게 작용했다.

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라 했다. 보통 윗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는 웃지 못할 패턴이 하나 있다.

  1. 아랫사람 A가 윗사람 B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조언을 한다.
  2. 아랫사람 C는 윗사람 B의 판단이 옳다고 말한다.
  3. B는 A와 C의 말을 모두 새겨듣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말해주는 부하가 있음에 크게 기뻐하고, 결국 자기 뜻대로 한다.
  4. B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진다.
  5. 그러나 A는 미운털이 박히고 C는 여전히 B의 신뢰를 얻는다.

윗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A는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하는 건가? 이게 조직생활의 원리인가? 당시에는 기분이 좀 나쁘더라도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울까...

CJ홈쇼핑과 CJ의 인터넷 쇼핑몰은 계열사이긴 했으나 원래는 다른 법인이었다. 이 두 회사가 합쳐질 때였는데, 덩치가 큰 홈쇼핑이 인터넷 쇼핑몰을 흡수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홈쇼핑 관계자들이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거다. 자기들이 무슨 감사원에서 나온 것처럼 누굴 오라가라 하질 않나, 무슨무슨 자료를 언제까지 내놓아라 하질 않나, 기존의 사업 방식에 문제가 많으니 싹 뜯어고치겠다고 하질 않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이다. 그런데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런 부당한 행태에 대해 인터넷 쇼핑몰의 이른바 어른들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정작 홈쇼핑 관계자들 앞에서는 단 한마디도 못한다는 거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두 회사 관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홈쇼핑의 대장한테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우리 자료가 보고 싶으면 먼저 그쪽 자료부터 내 놓으라고. 우리더러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 홈쇼핑도 지리멸렬하긴 마찬가지 아니냐고. 고분고분할 줄 알았던 인터넷 쇼핑몰 애들이 갑자기, 그것도 모두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게다가 새파랗게 어린 대리 녀석이 이사한테 그렇게 대들 줄은 몰랐나 보다. 갑자기 그쪽 대장의 기세가 꺾이더니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라고, 서로 잘 협조하자는 얘기였다고 둘러댔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는 우리쪽 어른들의 낯빛이 너무나 환했다. 자긴 이제껏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통쾌한 적이 없었다나. 아니 그럼, 본인이 그렇게 말하지, 그중에 직급도 제일 낮은 어린애가 분연히 떨쳐일어날 때까지 왜 가만 있었단 말인가. 지켜야 할 가정이 있어서? 가정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다시 조직생활을 하면 달라질까. 이제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는데 몸 사려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나 잘 안 될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일할 때 두 가지 원칙은 지킨다고 생각한다. 첫째, "일에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개인의 실존과 관련된 자존심이 아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어떻게 살겠나. 그러나 일에는 자존심을 세우면 안 된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깟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밀고나가는 건 우직한 게 아니라 똥고집이다. 둘째, "직언하지 않을 자신은 없다." 그쪽으로 가면 절벽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 있으라고? 그건 정말 어렵다. 조직이나 윗사람에 대한 애정이 말라버렸다면 그럴 수 있지만.

물론 나이가 들면서 나도 반성할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같은 말이라도 굳이 그렇게 날카롭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인데, 이왕 좋은 뜻으로 하는 말, 좀 더 유하게 하면 어디가 덧나랴. 이런 대화의 스킬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싶고,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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