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문제

롤플레잉 2009.03.05 21:16

오늘 수업 시간에 강사 선생이 학생들에게 물어본 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여론이란 무엇인가?" 일순 흐르는 정적.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우리가 평소 아무런 고민이나 의심 없이 쓰고 있는 많은 개념들. 그 개념의 정확한 뜻이나 형성 과정에 대해 어느 순간 질문을 받는다면 혹여 잘못된 답이라 하더라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분야 학문의 종사가 아닌 다음에야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개념에 대해 누군가가 설명해 놓은 글을 보거나 말을 들어 보면 사실 별 건 아니다. 엄청나게 어려운 개념도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즉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이다. 다만 그렇게 간단하고 깔끔하게 포장할 수 없었을 뿐. 강사 선생의 말을 듣고 나면 싱거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약간 분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고 해서 앞으로 학생들이 자유롭고 자신있게 그들의 의견을 펼치진 않을 것 같다.

그럼 왜 우린 '정치'가 무엇인가 하는 평범한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까?

첫째로 수업 시간이라는 사태가 주는 무게가 작용하는 것 같다. 평소에 술자리에서라면 거침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수업 시간에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뭔가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용어를 써 가며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명제 형식으로 말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생이 평소처럼 스스럼 없이 얘기하라고 하더라도, 선생 앞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학문 또는 진리 앞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무지한 개인이기에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교사의 능력일텐데, 이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둘째는 굳이 학문적인 명제가 아니라도 남들 앞에서, 즉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 성향의 문제와 길들여진, 즉 후천적으로 체득된 처세에 가까운 '살아남는 법'이 버무려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남들 앞에서 틀릴 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 교육이 개개인에게 타인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훈련을 거의 시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괜히 튀어서 좋을 게 없으며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이제껏 살아오면서 체득해왔기 때문이다. 말 안 해서 보는 손해가 말해서 보는 손해보다는 훨씬 덜하다.

마지막으로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주어진 개념에 대해 실제로도 이제껏 별로 고민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매일같이 뉴스 섹션에서 보는 '정치'라는 개념이지만,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 많진 않을 것이다. 이는 '정치'라는 주제가 무거워서인 것만은 아니다. MBC에서 하는 '세바퀴'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퀴즈 코너 중 '두 단어의 차이'를 설명 하는 게 있는데, 정말로 이걸 보면 만만치가 않다. 흔히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이지만 그 차이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세상 뭐 그렇게 시시콜콜 다 따지고 사느냐, 그냥 편하게 살자고 말할 수도 있다. 그거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의사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느냐고 말이다. 그렇다. '섹시'와 '요염'과 '뇌쇄'의 차이를 모른다고 사는 데 뭐 그리 큰 지장이 있겠는가. 하지만 요즈음과 같이 전 사회가 소통의 문제로 고통받는 것을 보면, 정말 개념의 문제부터 다시금 바로잡아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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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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