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 년째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가 있다. 녀석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갑자기 증발해 버렸는데, 어느 날부터 그냥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시작했다. 신호는 계속 가는데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쩔 작정인지 보자 싶어서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때까지 몇 번이고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려 보았으나 아무리해도 소용 없었다. 처음엔 문자 메시지도 남겨 보고, 음성사서함에 목소리도 남겨 보았으나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엔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부터는 아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을 찾는 전화 벨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전원을 꺼 버린 것이다.

녀석을 아는 주위 사람들을 수소문하면서 걱정이 쌓여갔다. 나에게만 연락을 끊은 게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모든 연락 가능한 사람들로부터 단절이 시작된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나만큼은 녀석의 소식을 알고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녀석을 보기로 약속한 게 작년 2월이었는데, 그날 무슨 일인가로 내가 약속을 깨어 버린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될 일이다. 그날 녀석을 보았으면 이런 완전한 단절에 대한 실마리라도 잡아낼 수 있었을까.

처음엔 혹시 갑작스런 사고로 녀석이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녀석의 번호가 완전히 없어지거나 다른 사람의 명의로 변경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그건 아닌 것 같다. 더우기 그런 사고가 생겼다면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가족이 연락을 했음에 틀림 없을테고, 따라서 최악의 상황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일까. 주위 사람들에게, 아니면 최소한 나라는 사람에게 크게 서운한 게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평소 녀석의 성격상 그런 게 있으면 말을 하고 말지, 아예 연락을 끊어버릴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이도저도 아니면 지인들에게 말못할 고민이 있거나, 좀 더 나쁜 상상을 해 보자면 연락을 취하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아무튼 녀석이 잠적을 해 버릴 즈음의 건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은고로, 첫째 연락을 못할 상황이거나, 둘째 자신의 상태로 인해 만사가 귀찮아서 연락을 안 하거나, 셋째 자신의 상태로 인해 스스로 바깥 세상으로 난 문을 닫아 걸어버린 경우이거나, 마지막으로 가장 희망적인 가정을 해 보자면 어디 조용한 곳으로 요양을 하러 들어갔거나일 수 있겠다. 그런데 만약 연락을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좀 괘씸하기까지 하다. 물론 녀석의 괴로운 상태를 모르는 바는 아니며,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한들 친구된 입장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디 말도 없이 잠적해 버리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몸이 성해도 다들 걱정할 판데, 심지어 몸이 그 모양인데 누가 걱정하지 않겠나.

그 이후로 친구들끼리 모이거나 연락할 때마나 녀석의 소식은 없었는지 확인하는 게 일상화되었으나, 요새는 다들 어느 정도는 지쳐간다. 전화 번호 살아있는 걸 보면 아주 죽지는 않은 모양이니 기어나오고 싶을 때 기어나오겠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얼마 전 꿈에 오랜만에 녀석이 나왔는데 그 몰골이 너무나 끔찍하여 그날 이후로 맘이 영 좋지 않다. 꿈에서 녀석은 확 늙어 버리고 볼살은 흉하게 늘어졌으며 몸매도 말이 아닌데다가 심지어 한 쪽 다리를 절기까지 했다. 녀석을 보고는 화가 치민 내가 녀석을 마구 때리면서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냐고 몰아부쳤는데, 녀석은 힘 없이,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내 주먹을 그냥 맞아가면서 한 마디만 한다. 그냥 아파서 연락 안 한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내 눈길을 피한 채 내 옆을 슬프고 피곤한 얼굴로 느릿느릿 지나쳐서 걷기 시작했다. 뒤뚱뒤뚱 걷는 녀석의 뒷모습이 마치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습작용 유전자 조작 생물체처럼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난 그 모습에 마치 얼어붙은 듯, 녀석을 쫓아가지 못하고 내 눈 앞에 나 있는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는 녀석을 물끄러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살아있긴 한 걸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들에게 서운한 게 있어서 잠적해 버린 거라면 좋겠다. 살아있기만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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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축에 들며,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런 나도 가만히 따져보면 꽤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의 머리통의 크기에 관한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이후로 우리의 위대한 대갈장군들에 대한 편견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아직도 그 대갈장군은 내 주위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편의상 그를 S라 하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바로 월드컵 최순호 사건의 그 S이다. S는 내 인생의 거의 최초의 대두(大頭)라 할 수 있다. 설마하니 그 전에도 살면서 대갈통 큰 인간을 만나지 못했으랴만 기억이 나질 않는 걸로 미루어 내게 그다지 인상적인 놈들은 없었나 보다. 암튼 S는 1학년 때부터 동기들 사이에 유명했다. 동기들을 마치 후배 대하듯 하는 막강 안하무인에다가 적재 적소에 뿌려주는 특유의 비웃는 듯한 웃음 등등. 동기들이 S의 내공을 결정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은 1학년 농활 때였다. 아니 대체 누가 1학년 더러 작업 지시를 시켰단 말인가. 1학년 모두 뙤약볕에서 낫 들고 허리 끊어져라 논두렁 잡초를 베거나 거머리랑 싸워 가며 김매는 동안, 대체 누가 저더러 삽자루 들고 허리 펴가며 동기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작업을 지시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단 말인가. 너무나도 태연하고 뻔뻔한 S의 행동에 처음엔 동기들 모두 약간은 얼이 빠진 채로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정도였다. 그 이후로 대갈장군과 '뻔뻔함'은 떼어 놓고 생각 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연예계에서는 S정도는 아마추어로 만들어 버리는 대갈장군이 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김래원이다. TV에서 처음 보는 순간부터 주는 거 없이 미운 스타일이었다. 편견이라는 거 인정한다. 그래, 대갈통 크기로 저평가해온 점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치만 김래원이 맡아 온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출세작이라고들 하는 '옥탑방 고양이'는 울화통이 치밀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정다빈 얘는 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길래 저런 싸가지를 참아 주는 걸까..."
건방진 것과 싸가지 없음은 좀 다른 개념으로 봐야 한다. 난 건방진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 유감 없다. 사실 건방짐은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싸가지 없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인간 일반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있어야 되는 거다. 최소한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김래원의 모습은 전자는 아니었다. 남의 집에 얹혀 살면서 어찌 저리 뻔뻔할 수 있는지... 나 같으면 쫓아내도 몇 번을 쫓아내었을 것이며, 그래도 기어 들어오려 한다면 경찰에 신고했을 거다. 출연작 '어린 신부', '미스터 소크라테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등에서 김래원은 단 한 번도 내 기대를 져버린 적이 없다. 그런 김래원이 최근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라는 드라마로 돌아왔단다. 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번엔 어떤 캐릭터인지도 사실 모르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김래원한테 억울한 일 있냐고? 그럴 리가 있나. S가 요즘도 그렇게 사냐고? 설마!~ 그랬으면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을라구... 그러길래 처음부터 편견이라고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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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오늘 새벽 1시경 MSN 메신저로 친구 녀석 M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M(친구 M): 안자나?
D(도그마): 자야지.
M: 모하나?
D: 별로... 아무것도 안 해.
M: 엠티도 갔다오고... 너무 젊게 사는구나..
D: 고되게 사는 거지.

중략

M: 집이라도 가까우면 남산에 가서 컵라면이라도 한사발 끓여먹고 헤어지면 좋은데, 이젠 너무 늙었구나.
D: 그러게 말이다.
D: 넌 근데 어쩐 일이냐.. 원래 이시간에 안자냐?
M: 이 시간에 컵라면 먹기엔 속이 버텨주지 못할것 같고...
D: ㅋㅋ
M: 원래 늦게 자지.
D: 컵라면 같은 박한 음식을 먹기엔 좀 늦었지.
M: 사실은 집에서 이메일좀 보다가 일이 좀 잘못된걸 늦게사 발견하고 저녁에 사무실 뛰어나갔다가 열한시쯤에 왔어.
D: 저런..
M: 참고로..
M: 이제 진짜로 위장이 늙어가나봐. 막 쓰리고.. 그래서 요즘은 밤에 배고프면 라면 대신 스프를 끓여먹기로 했다.
D: 스프도 별로 안 좋을 걸.
M: 엥?
M: 이것도 역시 instant 라 그런가?
D: 난 자다 속 쓰려서 벌떡 일어난 적도 있잖아.
D: 물론이지.
M: 스프 먹고서 쓰렸어?
D: 내가 웬만하면 자다가 일어나는 사람이 아닌데..
D: 스프만 먹고 그런 건 아니지만.. 스프라고 뭐 좋겠냐.
M: 이 시간에 뭘 먹은들 몸에 좋겠냐?
D: ㅋㅋ
D: 그래도 닭죽이나 뭐 그런 종류 없냐.
M: 그나마 부담이 좀 덜할것 같다는 약간의 기대..
M: 닭죽?
D: 응.
M: 그런거 집에 대놓고 먹는 사람 있냐? 무슨 날이나 돼야 먹지.
D: 그래서 스프 끓여서 국물만 후루룩 먹었단 말이냐?
D: 웬지 불쌍 모드인걸..
M: 며칠전 이 나이 되도록 혼자사는 노총각 동료와 컨설팅을 한 결과, 스프에 식빵 찍어먹으면 좋다고 해서
D: ㅋㅋ
M: 그날밤 스프는 사왔는데, 식빵이 없잖어.
D: 특이하구만... 스프에 식빵이라...
D: 근데 스프만 따로 팔기도 하남?
M: 그래서 스프만 먹었었지. 오늘은 마누라가 식빵 사다놓은게 있으니까 그날 먹다 남은 스프를.. 맛있겠다.
M: 오뚜기 쇠고기 스프
M: 가루로 된거 몰라?
D: 푸하하..
D: 난 또...
M: 이런 미친놈.
D: 난 라면 스프만 먹는 줄 알았잖아..
M: 야이 미친놈아
D: ㅋㅋ.. 그러니까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
M: 내가 미친놈인줄 알어? 이 미친놈아?
D: ㅎㅎ
D: 미친놈처럼 얘기하두만 뭐.
M: 어쩌면 생각이 그렇냐... 상상력이 너무 앞서가는거 아냐?
D: 흐.. 글쎄... 라면 얘기 나온 직후 따라오는 스프라면 그 스프가 아닐까..
D: 오히려 네가 좀 앞서간 느낌이 있다.
M: 라면이 부담되서 못먹겠다는 사람이 스프만 먹는다?
D: 걍 스프라면 모르겠으되 라면에 이어진 스프라면 내 생각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겠어?
M: 하긴, 그 스프에 식빵 찍어먹는다고 생각했으면 내가 미친놈처럼 보였겠군...
D: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이 미친 것이.. 쯔쯔...' 했겠냐...
M: 엽기적인 아이디어인데?
D: 말 나온 김에 함 먹어볼라구?
M: 어.
D: ㅋㅋ
M: 마침 식빵도 있고 하니..
M: 배고픈데 잘됐다.
D: 흐~

후략
라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스프는 당연히 '라면 스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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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과 자장면

프렌즈 2006. 2. 20. 17:11
요즘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예전엔 졸업식에 자장면을 먹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중국집에서 다른 메뉴도 아니고 딱 자장면 한 그릇 해치웠다. 6학년 때엔 하루 걸러 한 번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2교시 마치고 먹어치운 후, 점심시간에 학교 앞 중국집에서 또 자장면을 먹었을 정도로 흔하디 흔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떤 날엔 꼭 먹어야 하는 음식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식 말고도 자장면이 빠지지 않는 날이 있는데 바로 이사하는 날, 휴가 나오는 날 등이다. 일병 첫 휴가 나왔을 때 함께 나온 동기들과 부대 앞에서 먹은 자장면 곱배기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외식 거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요즘도 졸업식과 자장면은 이렇게 가슴 찡한 얘깃거리를 만들어준다.

이 글을 보니 내 주위에도 이 둘에 얽힌 사연이 하나 있어 소개한다.

대학 동기 R은 학창시절부터 인물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여 항상 여자친구가 있었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처럼 생겼다고들 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자기 주먹을 입에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입이 크긴 하지만, 심지어 초코파이도 세워서 들락날락할 수 있지만, 그래도 꽤 잘생긴 프랑켄슈타인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날은 R의 여자친구가 졸업하는 날이었다. 군대 다녀온 후 복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R은 당연하게도 꽃돌이가 되었고, 드디어 공식적으로 여자친구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교정을 옮겨다니며 졸업사진을 찍어주고 짐도 들어 주기를 두어 시간, 점심 시간이 되었을 때, 멀쩡하게 생긴 딸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꽤나 좋아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꽃돌이에게 외식 취향을 물었다.
"자넨 뭐가 좋은가?"
"당연히 졸업식엔 중국집이죠!"
"중국집?"
"예!"
군대식으로 절도 있게 대답한 R과, 중국집도 좋다고 생각한 여자친구의 가족들은 함께 근사한 중국집으로 이동했다. 특실에 자리 잡은 가족들은 메뉴판을 보며 어떤 코스가 좋겠다고 한 마디씩 했다. 그때 다시 꽃돌이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긴 아버지...
"어떤 코스가 좋겠는가?"
"아닙니다. 전 자장면이 좋습니다."
R은 다 좋은데 원칙에 너무 강하다.
"아니 자장면은 어떤 코스라도 나중에 다 나와."
"전 괜찮습니다. 자장면 시켜 주세요."
"내가 산다니깐. 걱정 말고 시켜 이 사람아..."
"전 자장면이 좋습니다. 졸업식엔 뭐니뭐니해도 자장면이죠..."
화기애애하던 그날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졌고, 결국 얼마 못 가서 그 둘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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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닷컴의 축구게시판을 보면 나름대로 축구 마니아로 보이는 이들이 진을 치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평소 포털의 뉴스에 올라오는 댓글이나 이런 스포츠지의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나랑은 하등의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즉 다른 세계의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얼마전 동기들 모임에서 T가 스포츠서울닷컴의 축구게시판에 상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금 의외였다. 학창 시절이나 사회 진출 이후의 모습에서도 그가 친구들에게 축구 전도사로 활약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정말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다.

아직 학생이었을 때다. 유신론자, 정확히 말해 기독교인인 T와 무신론자인 나는 언젠가 서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세계관이 다르다면 나중에 우린 계급투쟁의 장에서 서로 적대적인 모습으로 만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우리의 예상은 아주 많이 빗나갔지만 대신 이렇게 의외의 공간,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만나기도 한다.

황우석 사태나 임수경 악플 사건 등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저주의 댓글 속에 혹시 내가 학창시절에 함께 웃고 울던 친구가 섞여 있을 수도 있겠다고...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논객이 생각지도 않게 내 친구이듯, 누군가를 저주하는 악플러 중에 친구 하나쯤 들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런 사람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울한 일이었는데, 심지어 지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아주 심하게 우울해진다.

내 경험으로 보건데 사람이 스물 다섯 살 이후로는 친구 만들기가 아주아주 어렵다. 이때부터는 친구가 늘어나지 않고 서서히 줄어간다. 개인이 사회에서 생산관계 속에 편입되어 버리면 더이상 타인을 친구로 만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사실 T랑 내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친구로 엮여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게시판 같은 곳에서 만나 우정을 쌓을 수 있었을까 싶다.

공교육의 위기를 이야기하며 홈스쿨링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계급으로 분화되기 전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기능만큼은 아직 사교육이 공교육을 따라갈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점점더 사는 곳이나 부모의 경제적 위치에 따라 교육의 기회조차 분화되어가고 있지만...

어린시절 함께 뛰놀던 초등학교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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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술내기

프렌즈 2006. 2. 11. 16:36
지난해 말 송년회도 못했던 동기들이 어제 강남역에서 모였다. 그래 봐야 남자 넷이서 모일 작정이었고, 그나마 한 놈은 퇴근시간 무렵 직장 상사에게 잡혔는지 결국 나오지 못했다. 광 파는 인간은 못 오더라도 세 명이면 그래도 밥먹고 술 한 잔 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다.

영광굴비로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사이비 와인바에 자리를 잡았다. 가격이 비싼 것 말고는 마주앙이랑 무슨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는 와인에, 저녁을 먹어서 그랬는지 왠지 손이 잘 안 가는 치즈를 안주로 시켜놓고, 직장 상사에 대한 성토로 시작해서 수능 얘기로, 학교 다닐 때 배운 과목 중에서 지금도 유익하다 싶은 것들, 혹은 그 때 공부 좀 해 놓지 못한 것이 아쉬운 과목들, 송도 신 캠퍼스 얘기 등 주제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결국은 주제가 온국민의 단골 메뉴 스포츠로 방향을 틀었는데...

처음엔 화기애애했다고 할 수 있다. 정재근, 문경은, 이상민, 전희철 등이 거론되었던 농구 얘기나, 박노준이 라이벌로 의식했던 송진우, LG나 두산의 팀컬러 얘기, 서용빈에 대한 안타까움, LG가 이순철을 감독으로 기용하면서 어떻게 망가졌는지에 대한 얘기에서 우리 셋은 의기투합했었다. 그런데 당연히 올해의 관심사인 월드컵이 나오면서 좀 엉뚱하게 사건이 터졌다. 온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나 폴란드전의 한 골로 면죄부를 받았던 황선홍, 유럽에서 잘나가고 있다는 박지성, 이영표 등에 대해선 어차피 의견이 다를 만한 이유도 없었지만, 이동국이나 이천수 등이 도마에 올랐을 때에도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올해 월드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기 얘기가 입에 오르면 약간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는 최순호가 문제가 된 것이다. 월드컵 퍼즐을 맞추어 가던 우리 셋은 최순호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즉 어느 월드컵에 출전했는지에 다다랐을 때 갑작스레 적대적으로 변했다. S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최순호랑 황선홍이 함께 출전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당시 우린 미국 월드컵 때의 황선홍의 그 유명한 똥볼에 대해서 얘기중이었는데 뜬금없이 최순호가 그때 출전했다고, 심지어 한 골 넣었다고 우기는 S의 주장에 황당해진 T와 나는, 박창선이랑 같이 뛰어다니던 최순호가 미국 월드컵에 혹시라도 참가했다면 프런트로 갔을 것이라고 했지만 S는 의외로 강하게 반발했다. T랑 내가 잘 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최순호랑 황선홍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분명 월드컵에 함께 출전했으며(나중에 알아보니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최순호는 94년까지 장수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 오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S랑 T는 10만원 짜리 술내기에 들어갔다.
"흐흐... S야, 술 살 준비나 하거라."
"누가 할 소리. 이렇게들 정신이 없냐."
"둘 다 진정해. 근데 S 너 정말 생각 잘 해 보고 한 소리 맞어? 최순호 나이가 얼만데."
"시끄러.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그렇다. 난 사실 누가 이기든 떡이나 얻어먹으면 되지만, 요즘 직장에서 사장으로부터 전방위 쪼임을 당하고 있는, 그래서 약간 맛이 가서 헷갈린 게 틀림 없는 S가 나로선 안쓰러울 뿐이다.

고맙다, S야... 술은 잘 얻어먹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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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

프렌즈 2006. 2. 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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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정신 못 차린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돌아 보니 내가 지금 누구더러 뭐라 할 처지인가.

근본이 나쁜 인간은 아니다. 함께 하숙을 시작했을 때 내게 이불과 베개를 사 준 걸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근래에는 돈 번다고 고기도 사 주더라.
머리카락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남아있을 때, 올해는 어떻게든 장가 가서 그 집 밥 좀 얻어먹자.

--- 계속 업데이트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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