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다리미랑 얘기하다가 학교 다닐 적 수학 얘기가 잠깐 나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보니 책장에 아직도 꽂혀 있는 Lang의 『Linear Algebra』. 허허... 이게 아직도 꽂혀 있구나. 정말 명줄이 긴 놈이구만...

대학 1학년 3월에, 그러니까 아직은 공부가 날 싫어하기 전일 때, 학교 구내서점에서 산 책이다. 아마 하숙집의 경영학과 선배의 권유로 샀을 거다. 경제학과에서는 공식 교재로 Lang이 아닌 정필권 교수가 쓴 촌스럽게 시퍼런 표지의 『경제수학』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당시만 해도 안 해도 될 짓을 하던, 즉 오버질을 제대로한 학생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책임만은 아니다. 그 선배가 경제수학을 하려면 이 정도의 책은 기본적으로 봐야 된다고 해서, 누구나 사서 보는 줄 알고 산 거다. 그 다음주에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이 있다고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잖은가. 그래, 공부하자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그래서 그냥 봤다.

당연히 이 책을 끝까지 본 건 아닌데, 내가 파란 『경제수학』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공부가 날 싫어하게 되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이 책을 버리지 못한 건, 설마 아직도 나에게 수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인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한편으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어색한 마음에 요즘도 이 책을 파는지 인터넷 서점을 뒤졌더니 역시 팔고 있다. 그러나 가격에 쓰러진다. 7만원이 넘는단다. 그때랑 지금이랑 Third Edition에서 판수도 올라가지 않았는데, 설마 이 가격에 사는 사람이 있나? 이렇게 무식하게 비싸다는 건, 다시 말해서 모두들 복사해서 쓴다는 얘기가 되나? 그 때도 그렇게 비쌌다면 내가 샀을 것 같지 않은데... 생각하긴 싫지만 혹시 그 무시무시한 가격에도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책을 지른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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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레어는 아니지만 영어로 된 책은 많이들 가지고 있어도 불어로 된 건 주변에서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사고였다. 원서 파는 사이트에서 이 책을 보고, 그렇잖아도 원서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싶었던 차에 그림을 보고 이거다 싶어 단숨에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책을 보니까 어째 좀 이상하다. 책 표지에 있는 'Alice' 말고는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뭐야 이거... 그렇다. 불어다. 중학교 1학년 때에 불어사전을 영어사전으로 착각하고 1달 여를 이상하게 찾을 수 없는 단어가 많다고 투덜거리며 쓰다가, 나중에 사건의 전말을 알고는 가차없이 집어던진 이후로 처음 보는 불어다.

반품을 할까 말까 살짝 고민하다가, 반품 택배를 기다리는 건 또 귀찮아서 못 참는지라 관두기로 했다. 당연히 그림만 보는 거지 뭐...

그래도 이런 황당한 사고를 그림이 모두 보상해 줄 정도로 예쁘다. 지금은 꽤나 애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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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장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바둑소설
슈사이 명인과 기타니 7단의 바둑사의 대승부!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박진감에 넘친다. 마치 바둑을 두는 것을 직접 보고 있기라도 하듯 손에 땀이 쥐어진다. 긴장된 두 대국자의 표정이 눈에 선하고, 바둑돌 놓는 소리뿐인 대국실의 분위기가 가슴을 짓누른다. ...
-- 신경림‧시인

이같은 신경림 시인의 소개글에도 불구하고 전혀 박진감 또는 긴장감이 없는 신기한 소설이다. 당연히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글이지만, 바둑을 알고 또 좋아하는 사람조차도 '바둑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책을 보게 되면 왜 노벨 문학상이 별 게 아닌지를 어느 정도는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실화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이토록 재미 없기 힘들텐데도, 작가는 그 중에서 가기 어려운 길을 택한 것 같다. 아무튼 이상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독후감이므로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재미 있을 가능성은 무궁하다.

이 소설은 마지막 세습 혼인보(본인방本因坊) 슈사이(秀哉, 1908-1940) 명인의 인퇴기(引退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등장 인물에 기타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명을 사용할 정도로, 타큐멘터리인지 소설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출판사의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칭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에서 큰 감동은커녕 별다른 재미도 얻지 못한 이유는, 일본인 특유의 승부에 대한 비장함을 나로서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닮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노(老)명인이 자신의 바둑 인생을 이 한 판에 걸었다는데, 왜 난 자기 인생을 바둑 한 판에 거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승부에서 이기면 성공한 삶이고, 지면 실패한 삶이라는 건가? 왜 삶 자체로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는지... 한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안 그런 건 아니지만 일본 사람들이 이런 게 특히 심한데, 김연아와 대결하는 아사다 마오에게서도 이런 비장함이 풍겨 나오는 게 그래서 난 싫다. 기합이 들어갔다느니, 이를 악물고 했다느니... 스포츠 경기를 꼭 그렇게 목숨 걸고 해야 하나...

1992년 도서출판 '솔'에서 나왔다. 책값 4,000원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도 전혀 착하지 않다. 당연히 내가 사진 않았다. 당시 내게 바둑을 가르쳐 주던 두 학번 후배가 사서 보고 내게 준 책인데, 그 많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케 살아남은 책이다. 다음 번 이사 때 버릴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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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아내의 대학 전공 서적 중에서 『韓國漢文學史』라는 양장본의 책을 발견했다. 내 전공이 이래뵈도 역사인지라 끝에 史가 들어가는 책이 어찌 반갑지 않을까. 당연히 내용이 궁금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펴 보았는데...

당연히 내용을 알 수 없는 고사하고 도대체 눈을 둘 곳이 없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漢字로 쓸 수 없는 글자를 빼고는 모두 한자다.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긴 '한국문학사'를 쓴다 해도 한자 없이는 글이 안 될텐데, 하물며 '한국한문학사'임에랴... 그렇지만 본문에 정말 필요한 한자가 있나 하면, 내가 보기엔 이런 평범한 설명까지 한자로 표기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그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려버릴 정도로, 아무튼 가능한 한 모든 영역에서 한자로 도배를 해 놓았다. 혹시 한문 훈련용인가...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책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한문학사'가 굳이 따지자면 '역사'가 아닌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즉 역사와 한문학사가 보편과 특수의 관계가 아니라, 문학과 문학사가 그러한 관계인 것이다. 몇 학기 한문 사료읽기까지 우수한(?) 학점으로 패스했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설마 못 읽으랴...' 하는 맘도 없지 않았으나, 이놈의 책은 한 장만 봐도 숨이 턱 막히고 손발이 저려온다.

이런 무시무시한 책에 아내는 공부 열심히 했는지, 여기저기에 줄도 긋고 주석도 달아 놓았다. 그동안 몰랐는데 업수히 여길, 혹은 쉽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보면 이런 엄청난 공부를 했던 사람인 것이다. 오늘부터 아내를 존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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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한 번 보고 다시는 안 보는 책이 있나 하면, 또 어떤 책은 두고서 여러 번 보아도 언제나 재밌고, 다시 보면 그 전에 볼 때와는 다른 맛이 나거나 그 때에는 놓쳤던 새로운 부분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책이 있다.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당연히 후자에 속하며, 도그마 북컬렉션의 보물 1호를 다투는 후보 중의 하나다.

이 책을 살 때에 사연이 하나 있는데, 영풍문고에서 이 책을 본 순간 제목이 맘에 들었다.

"문장강화? 이걸 보면 글이 세지나? 책값도 싼데 그냥 속는 셈 치고 사 볼까?"

그런데 책을 일독하고서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두 번째 볼 때가 되어서야 '강화'가 强化가 아닌 講話임을 알게 되었다.

"어라, 강화가 그 강화가 아니네. 하하 재밌다..."

아무렴 어떠랴. 실제로 이 책은 글쓰기를 세게 만들어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우선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책값이 감동적이다. 1996년에 영풍문고에서 살 때만 해도 4,000원이었고 지금도 8,500이란다. 쓸데없이 4도 인쇄에 그것도 모자라 별색 표지를 써서 책값에 금칠을 하는 대신, 딱 받을 만큼만 받고 보라는 거다.

둘째, 가지고 다니기 좋다. 문고판이라 약속이 생겨 외출할 때 책장을 둘러보며 이번에 함께 출전할(?) 멤버들을 고르면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난다. 가방에 넣을 필요 없이 외투 주머니에 넣거나 그냥 손으로 들고 다녀도 좋다.

셋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재밌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글이지만 그 속에 예문으로 제시되고 있는 글들이 주옥같은 명작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글들을 골라내는 이태준의 안목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글 없이 좋은 편집자 나올 수 없듯이 이 책이 나올 당시의 한국문학이라는 좋은 텃밭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좋은 글쓰기라는 원래 목적의 달성뿐만 아니라 어느 새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부수적인 효과가 덤으로 따라온다.

넷째, 어쨌거나 이 책은 글쓰기를 위한 책인데, 과연 이 책을 통해 글쓰기가 나아질까? 최소한 내가 보기엔 그렇다. 요샌 워낙 글쓰기가 대부분 블로깅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래 생각하고 글을 쓰지도 않을뿐더러 제대로 된 퇴고의 과정을 거치기가 힘들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모르게 전수받은 그 무엇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글을 써 놓고 한 주만 지나면 맘에 안 드는 부분 주어와 술어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문장이 확 드러난다. 이럴 땐 정말 모조리 뜯어고치고 싶다.

아무튼 가격 대비 성능, 아니 효용으로 보자면 이만한 책이 없다.

하지만 이 책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다. 1939년에 나온 책이므로 그 이후의 한국문학의 성과물은 전혀 반영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이 책에서 박완서, 공지영, 은희경, 황석영, 조정래 등을 찾으려고 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렇다고 상허를 다시 살려내어 최근의 글들을 소재로 해서 재출간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거야 상허의 후배들이 낸 다른 책들이 그 몫을 해 주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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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책장에 꽂혀 있는 초레어 아이템이다. 1991년 푸른숲에서 나온 헝가리 태생의 독일 작가 가보 폰 바싸리(Gabor Von Vazary)의 소설 『몽쁘띠』. 거창한 이야기도 멋진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도 없는 소설. 그러나 이 책 이후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아이디는 monpetit가 되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만큼 내 삶에 나름대로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단 한 번만 읽었다는 것. 사실 그 이후로 다시 읽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두 번 다시 끝까지 읽지 못하고 몇 장 읽다가 다시 책장으로 밀려나곤 했다. 아마도 소설의 슬픈 결말을 내가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독일에서는 무려 500만부나 팔렸다고 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장담하건데 초판도 다 밀어내지 못했을 거다. 당연히 지금은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사실 아는 사람 아니면 구하고 싶지도 않을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소설. 그러나 여전히 내 책장 한 켠을 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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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과 콩나무

제이콥스 지음 | 양연주 옮김
웅진씽크하우스 2007.11.20
평점

인상깊은 구절
없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 - 세계명작' 시리즈, 제13권 『잭과 콩나무』. 이 시리즈는 4세부터 8세까지의 아이들이 꼭 읽어야 할 세계명작만을 담아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세계명작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아이들의 올바른 인성과 풍부한 감성을 길러줍니다.

권선징악이 뚜렷한 이야기, 모험담과 성장담, 도덕과 철학이 묻어나는 이야기 등을 읽음으로써, 창의력과 배려심, 그리고 건강한 자아상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책마다 다른 기법의 독창적인 그림을 담아내 읽는 재미뿐 아니라, 보는 재미도 건넵니다.

제13권 『잭과 콩나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소년 '잭'이 신기한 콩 때문에 겪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와 가난하게 살던 '잭'은 어느날 젖소를 팔러 시장에 갔다가, 하룻밤에 하늘까지 자란다는 신기한 콩을 파는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잭'에게 콩과 젖소를 바꾸자고 하는데……. 양장본.

...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이상이 '네이버 책'에서 볼 수 있는 책소개이다.

밤마다 큰 딸에게 읽어주고 있는 세계명작 시리즈. 근데 설마 『잭과 콩나무』에서 권선징악이나 모험담 또는 성장담, 도덕과 철학이 묻어난다고 편집자들은 생각한 건가? 이 책의 내용이 결국은 뭔가. 세상 어차피 착하게 살 필요 뭐 있나. 남의 물건 빼앗아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거 아닌가.

듣고 있던 딸이 묻는다.

"잭은 왜 거인에게서 거위를 훔쳐 왔어요?"
아빠로서 해 줄 말이 없다. 뭐라고 해야 되나. 거인이 아주 나쁜 놈이라서? 설령 그렇다고 해도, 거인이 나쁘면 나쁜 거지 그놈의 물건을 훔쳐오는 게 말이 되나. 여러 말 할 필요 없고 애들에게 이런 책을 보여 주면서 창의력과 배려심, 건강한 자아상을 바란다는 건 좀 우습다.

어쨌거나 오늘 저녁 딸에게 이 책을 읽어 주면서 다른 것보다도 주인공인 '잭'이 보통 놈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나라면 밤 사이에 콩나무가 하늘까지 자라도 그 위에 올라갈 수 없을 거다. 무슨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두 다리로 그 높은 곳을 올라갔다는 거 아닌가. 나쁜 놈이지만 아주 대단한 놈이다. 거인이 쫓아오니까 그 큰 콩나무를 단숨에 도끼로 찍어내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이름하여 '수퍼맨 잭'인가...

명작 어쩌고 하는 책들은 읽어 줄 게 못되는 것같다. 차라리 창작동화 쪽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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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강성호 지음
책세상 2003.09.10
평점

인상깊은 구절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을 비판하는 주장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는 일상 생활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비민주적 관습의 폐해가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파시즘'을 극복한다고 해서 더 큰 '구조적 파시즘'이 해결될 수 있는가? 또한 '일상적 파시즘'을 극복하는 것이 현 시기에 집중해야 할 주요 과제인가의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이 번지면서 한국의 역사학 또한 그 충격파에 시달려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갑자기 낡은 시대의 유산이 되어버렸고, 학계의 모든 영역을 ‘아직도 마르크스를 말하는가’하는 냉소적인 목소리가 지배했다. 한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차지했던 빈 자리를 빠르게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채워나갔다.

강성호 선생의 문제 의식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성과와 한계, 그리고 그 후의 새로운 모색을 점검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필요하며, 오히려 이것이 21세기의 불확실성과 신자유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무기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실천적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거대담론으로 환원시켜 버렸던 다양한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들에 대해 주목해, 역사의 지평을 넓힌 점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를 내려 주어야 한다.

이 책의 미덕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어떤 부분을 수용하여 새롭게 면모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것으로서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가 올바른가 하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강성호 선생과 캘리니코스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곧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 아니며, 다만 스탈린주의의 몰락을 뜻할 뿐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연상시킨다. 스탈린이라는 타자他者를 만들어내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결함 또는 당시 전세계 공산주의자들 모두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실천적 오류들을 모두 스탈린에게 전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학자에 따라서는 스탈린주의의 근원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오해하고 왜곡시킨 데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저작을 정리하고 출간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내용을 수정․삭제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진의가 왜곡되어 전해졌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가 예수의 참된 뜻을 왜곡하였으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듣는 것같다. 물론 여기서 스탈린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스탈린주의 자체는 객관적 실재였으며,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일정하게 왜곡시킨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스탈린만의 오류는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현실 적용의 실패는 스탈린의 작품인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아나키스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문제를 가지고 스탈린을 비판한다면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그럴 순 없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평가 또한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세계체제론이 핵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발전의 질적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서구 중심주의 시각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 또한 서구 중심주의의 다른 일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영국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공산품이 중국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를, 그리하여 마침내 영국이 아편 무역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만이 대중국 무역 적자를 겨우 반전시킬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세계체제론은 논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서구만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 점 의심도 없이 전제로 깔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스탈린에 대한 평가나 세계체제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새로운 모색의 의의가 없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러한 견해 차이 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논쟁을 통해 고쳐가야 할 오류가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터이고, 이러한 과정 자체가 새로운 모색의 일부가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 역사학 또한 거시적 관점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미시사와 거시사의 분업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미 미시사의 사료 분석 틀 속에 거시적 관점이 녹아있다는 것은 비단 독자뿐만 아니라 미시사 역사가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가가 고양이 학살이라는 사건 속에서 직조공과 부르주아의 긴장 관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거시적 관점이라는 기초의 전제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두꺼운 묘사’라는 개념 속에 이미 ‘치밀한 묘사’를 넘어서는 거시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성호 선생이 맺음말에서 말하듯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기존의 사회사, 미시사, 신문화사에서 제기된 연구 성과들을 적극 수용하여야 하며, 그동안 계급이나 민족의 개념 아래에서 소외되었던 다양한 역사 주체들을 복원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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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에 과제로 썼던 글인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정말 맘에 안 들지만, 이 또한 내 개인의 역사가 아니겠나. 그리하여 순전히 보관의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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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1996.01.01
평점

인상깊은 구절
종말이 가까워질 무렵, 황제는 자기 주위의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후궁들과 법가 신하들을 모두 죽인 뒤에, 황제는 철기 기술자인 자기 스승에게 명하여 철제 꼭두각시들을 만들게 했다. 자기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신하들은 오로지 그 꼭두각시들뿐이었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세상에는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들이 있다. 백과사전류는 그런 용도로 쓰기 딱 좋은 책이다. 항목별로 짧게 끊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책을 덮어도 부담이 없다. 화장실에서는 단편소설도 부담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한 편 다 보고 나가려다가 다리 저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또한 백과사전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굳이 책갈피로 표시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잡히는 대로 눈이 가는 대로 훑어가면 된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돈 주고 사지 않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이 집에 한 권 있다. 바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다. 당연히 사서 보는 책은 아니다. 누군가가 아내에게 선물한 책이다. 세상에는 이른바 어이없이 뜬 소설가도 있기 마련인데, 베르베르가 딱 그런 인물이다. '개미'를 읽을 땐 나름 신선한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 작품인 '타나토노트'를 보면서 경악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윤회'라는 개념을 천박하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글을 쓰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아니나 다를까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전혀 먹어주지 않는 이 사람의 책을 어째서 우리는 자꾸자꾸 팔아 줘서, 이 말도 안 되는 상상력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 혼자라도 이 사람의 책을 팔아 주지 않는 것이 인류 공영을 위하여 조금이나마 일조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그 이후로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작가인데, 어쩌다가 이놈의 책이 우리 집에 굴러들어왔는지... 책으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그래도 '개미'는 제대로 봤기 때문에 그 속에 등장하는 '... 지식의 백과사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데다가, 이 책을 보면서 지금은 다 까먹은 '개미'의 스토리도 조금씩 생각나게 하는 효과도 있어서, 무엇보다도 요즘 화장실에서 읽을 만한 마땅한 소스가 떨어진 마당에, 이 책은 이 공간에서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베르베르에 대한 나의 심한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막상 읽어보니 꽤 재밌는 내용이었다. 개미와 곤충뿐만 아니라 작가의 여러 잡상식이 뒤덤벅되어 뜻하지 않았던 읽을 거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다.

이 놈 의외로 박식한 면이 있었군...
뭐 완전 또라이스키는 아니었나...
개미의 사회나 파리 지하철역의 귀뚜라미 같은 항목은 꽤 재밌더라. 그런데 '진시황'에 와서 잠깐 동안 괜찮아졌던 작가에 대한 인상이 한 순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아니 이 놈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중국 역사나 진시황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있는 놈인가.
도대체 이 놈은 어디서 진시황 얘기를 들은 거야? 무슨 야사집 같은 데서?
'믿거나 말거나'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책으로 옮겨 적었나?
진시황 정(政)이 법가 신하들을 모두 죽였다고? 그럼 혼자서 나라를 다스렸단 말인가? 후궁을 모두 죽였다고? 야, 베르베르. 솔직히 말해라. 이 스키 중국 역사책 한 번도 본 적 없지? 그러고도 이런 글을 써서 돈을 벌 생각을 한단 말이냐...

이 시점에서 정말로 궁금해진다. 이런 식의 독자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생각의 원천은 베르베르 개인의 얕음인지, 프랑스인의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면 유럽인의 동양사에 대한 인식의 한계인지. 황제지배체제의 선결요건인 군현제나 그와 동전의 양면인 관료제 등에 대한 깊은 지식은 사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인식은 동양인을 '반지의 제왕'의 오크 정도로 보는 것과 매한가지다. '진시황' 항목에 와서 이제까지 봤던 책의 다른 내용에 대한 생각도 한꺼번에 달라졌다. 귀뚜라미? 이 놈이 정말로 조사를 해 보고 글을 쓴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요네즈? 아는 친구한테 듣고 무작정 쓴 내용인지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기대하고 본 건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베르베르를 업수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타나토노트'에서 받았던 어처구니 없음이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난다. 일개 소설가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가? 근데 독자로서 이 정도는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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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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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바꾸는 월드체인저들의 미래코드"라는 어마어마한 부제목을 가진, 2009 신년 벽두에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다. 무려 703쪽이나 되는 만만치 않은 분량에, 요새 워낙 책값이 비싸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겠지만 그래도 책 소개만 보고 덜렁 사서 보기엔 부담스러운 가격, 게다가 지속가능성을 내세운 책답지 않게 하드 커버에 종이 질은 또 엄청나다는 모순까지. 다행히도 학교 도서관에 들어왔다길래 잽싸게 달려가서 봤는데...

     아무튼 책의 취지는 환영할 만하다. 정말로 많고 많은 얘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내용은 간단하다. 착하게 살자,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부이다. 얼마나 좋은가... 단순히 어떻게 살자는 것을 넘어서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 전부는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추가해 달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는다. 그런데 이놈의 성격 또 나오는지는 몰라도, 딴죽 걸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심각한 환경 문제들에 직면했다. 중국의 GDP는 1978년 이래 두 배가 되었고, 1990년대에 경제는 연간 10퍼센트씩 성장했다. 이 성장의 시기를 '중국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기적은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지역 열 곳 중 일곱 군데가 중국에 있다. 도시 용수의 90퍼센트가 오염된 것으로 보이고, 국토의 3분의 1 가량에 산성비가 내린다. ...... 또한 중국은 세계에서 둘째로 온실 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국가다. (중국 2004년 자료)
    중국은 이미 지구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 중국이 완벽하게 변신하지 않고서는 지구의 밝은 친환경 미래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중국은 그저 서구를 따라 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

(월드체인징, pp.342-343, 바다출판사)

    구구절절 옳은 얘기다. 그런데 중국더러 서구를 따라 하지 말라고 서구인들이 말하는 건 좀 웃기지 않은가? 아니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가. 물론 중국에 강제로 저들이 공장을 지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 분업 체계 속에서 임금 경쟁력 하나 보고 굴뚝 산업은 모조리 중국으로 몰려가지 않았던가. 자국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몰리건 말건, 실업자가 되어 굶어죽건 말건, 생산의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전세계의 자본이 중국으로 몰려가지 않았던가. 좋다. 생산비가 절감된다는데 못 갈 것 없다고 치자. 그들이 중국에 공장을 세울 때 처음부터 환경을 생각했다면 지금처럼 중국의 변신 운운할 필요가 있었을까.

    신자유주의를 말할 때 선진자본주의의 행태를 이른바 '사다리 걷어차기'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친환경, 지속가능성 운운하는 논리 속에도 똑같은 철학이 숨어 있다. 친환경이라는 새로운 경쟁력으로 무장한 그들은 후발 개발도상국들에게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기준을 강요한다. 중국에 마구잡이로 공장을 짓던 그들은 이제 다시 중국의 임금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하자 또다른 공장을 찾아나섰다. 이미 동남아시아라는 새로운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화전민 보는 것 같지 않나? 한 곳의 지력이 떨어지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물론 나도 누구보다 중국이 친환경 산업 구조를 갖추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내 자식이 지금 마시는 공기가 중국 어느 공장에서 뿜어낸 매연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괴롭다. 하지만 환경에 대한 담론까지 새로운 장벽으로 삼는 서구의 행태를 보면 월드체인징 어쩌고 하는 꼴이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놈의 성격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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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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