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플레잉'에 해당되는 글 239건

  1. 2006.03.27 답사 가기 전에...
  2. 2006.03.25 그 옛날의 커리큘럼 2
  3. 2006.03.24 예전에 부르던 노래
  4. 2006.03.23 올빼미 기르기
  5. 2006.03.22 꿈속의 꿈
  6. 2006.03.20 군대의 득과 실
  7. 2006.03.18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8. 2006.03.16 교통사고
  9. 2006.03.15 심리학의 악몽
  10. 2006.03.15 벼랑 끝으로 몰기
패키지 여행은 마치 일본식 RPG와 같다. 그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여행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닥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의 초짜일 뿐만 아니라 귀찮은 거 딱 싫어하는 나로선 여행 같은 것에 괜스레 폼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남들 움직일 때 묻어가고, 남들 쉴때 같이 쉬고, 남들 먹을 때 밥숟갈 하나 더 놓는 거. 이것이 내 삶의 철학 아니던가. 코스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고, 열차편이 있는지 알아보지 않아도 되고, 맛대가리 없는 식당 걸릴까 걱정할 필요 없어서 좋다. 그런 면에서 패키지 여행은 딱 내 스타일이다. 처음 가는 여행은 이렇게 가고, 나중에 혼자 갈 땐 괜찮았던 곳만 찍어 가면 되는 것이다.

내일 답사를 간다. 3박4일의 짦지 않는 기간에다가 돌아볼 곳도 상당히 많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잔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뭐 이 정도는 묻어가는 거니까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설마 나만 놔두고 가진 않을 거 아닌가. 다만 심히 걸리는 것이, 며칠간 외박을 한다는 것인데...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내가 워낙 집(家)적이라, 밖에서 자는 걸 아주 싫어한다. 아무리 늦게 술을 먹거나, 아무리 멀리 여행을 가더라도,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집에 가서 잔다. 집에 꿀단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밖에서 자는 건 영 편하지가 않다.

그럼 내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또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학창시절만 해도 동가식서가숙으로 유명했던 몸이다. 동기들 집 순회방문, 학생회실 철야 근무(?), 심야 만화방 등... 하숙집 아주머니가 날 면회라도 할라치면 며칠을 기다려야 얼굴 한 번 볼까 말까 하던 귀하신 몸이었다. 나중에 자취를 할 땐 그 정도가 더 심해졌는데, 아무래도 집에 들어가 봐야 방에 온기도 없고, 기다려 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굳이 집에 기어들어갈 생각이 나겠는가. 하지만 다년간의 방랑 생활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져 버렸다. 전세를 얻어 제대로 정착하게 된 이후로는 다시는 외박 같은 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외박만 아니면 꽤나 괜찮은 패키지 여행이 기다린다. 이런 다소 강제적인 여행이 아니라면 절대 내 의지로는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없을 거다. 여행기는 다녀와서...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이 더 아름답다  (0) 2006.04.02
둘 중의 하나  (0) 2006.04.01
그 옛날의 커리큘럼  (2) 2006.03.25
예전에 부르던 노래  (0) 2006.03.24
올빼미 기르기  (0) 2006.03.23
Posted by 도그마™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질투는 나의 힘 中, 기형도
정말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책장에 꽂혀 있던 어느 책이 종이 하나를 떨어뜨렸다. '편집부 89학번 학습 프로그램(2차)' 라는 제목의 종이다. 요즈음처럼 워드 프로세스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글이다. 다음은 문제의 학습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2차 편집부 학습 프로그램의 목표는 칸트의 말과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올바르게 복무하기 위하여는 현실 분석의 위력 있는 무기를 얻도록 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2차 학습 프로그램은 그러한 점을 통해서 성원 개개인의 내적 성장을 기할 수 있도록 한다.

part 1> 철학적 제문제
철학은 세계관으로서,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노는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이미 앞서의 학습에서 인식되어졌으리라 여긴다. 이 2차 학습에서는 그러한 문제인식을 실제 '삶의 변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다.

(참고서적:
『칸트』, F. 코플스톤, 중원문화
『칸트 철학 입문』, W.O. 되에링, 중원문화
『헤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강의』, 황세연, 중원문화)
(* 도서는 참고서적과 기본서적을 제시할 것이며, 기본서적을 골간으로 하여 참고서적으로 보충할 것: 위에서는 '과학적 세계관'의 모태로서 칸트와 헤겔의 역할과 사상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것)

- 기본서적:『변증법적 유물론』, 아파나셰프, 백두
(참고서적:『세계철학사 II』, 아카데미, 녹두 『철학의 기초이론』, 콘스탄티노프, 두레)

후략
이 학습 프로그램(커리큘럼)의 백미는 역시 참고서적에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당시 편집부 선배의 친척이 중원문화 라는 출판사에 다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기본서적 한 권에 참고서적은 최소 두 권이다. 설마 이 참고서적을 다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리라 기대한 걸까. 아니면 선배들의 의식 수준은 저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으라는 것일까. 위에는 인용되지 않았으나 경제학적 제문제의 기본서적은 부총양삼(富塚良三)의 『경제학원론』이다. 이건 당시 군대의 금서 목록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책이었다. 다른 정치경제학 관련 서적은 어지간하면 금서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여기에 참고서적으로 소개된 책이 아파나셰프의 『위대한 발견』과 마르크스 선생의 『자본』, 루빈의 『마르크스의 가치론』, 뵘바베르크의 『노동가치론 논쟁』 등이다.

참고로 이 커리큘럼은 이제 막 『철학에세이』나 한국 근현대사를 읽고 난 1학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당시 1학년들은 다른 학회나 동아리에선 대체 무얼 공부하는지 궁금하여 서로 커리큘럼을 교환하곤 했는데, 다른 곳은 다들 비슷비슷한데 우리 편집부만 전혀 다른 걸 배우는 것이었다. 다른 학회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칸트나 헤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부 선배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만 커리큘럼이 달라요?"
"이게 제대로 공부하는 거지."
"다른 학회들은 그럼 뭐죠?"
"편집부는 원래 수준이 좀 달라..."
"???"
정말 그런 것인지 수기 아저씨에게 묻고 싶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둘 중의 하나  (0) 2006.04.01
답사 가기 전에...  (0) 2006.03.27
예전에 부르던 노래  (0) 2006.03.24
올빼미 기르기  (0) 2006.03.23
꿈속의 꿈  (0) 2006.03.22
Posted by 도그마™
,
붉은 노을 한울에 퍼져 핍박의 설움이 받쳐
보국안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한울북 울리며
흙 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 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
유도불도 누천년의 운이 다했다 농민들의 흐느낌이다
저 흰산 위엔 대나무 숲을 이루고 봉황대엔 달이 비춘다
검은 해가 비로소 빛을 내던 날 황토현의 횃불이 탄다
하늘 아래 들판에 산 위에 가슴마다 타는 분노는 무엇이었나
갑오년의 핏발 어린 외침은 우리 동학 농민 피다

학교에 가려고 새벽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탔다. 오늘따라 어쩐 일인지 자리가 나길래 잽싸게 앉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보다가 문득 예전에 부르던 노래 하나가 생각났다. 원래는 힘차게 불러야 되건만 아침 버스 안이라 그럴 수는 없다. 가만히 입 속으로만 불렀는데 무안하게도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고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누가 볼새라 얼른 눈물을 찍어냈다. 아침부터 이게 뭐냐...

아마도 오늘 '문화와 사회' 수업 시간에 할 내용 중의 '전투적 메시아니즘'과 다음주 답사 코스에 들어가 있는 동학농민전쟁 유적지의 합작품인 것 같다. 막상 그곳에 가면 덤덤하지 않을까 싶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답사 가기 전에...  (0) 2006.03.27
그 옛날의 커리큘럼  (2) 2006.03.25
올빼미 기르기  (0) 2006.03.23
꿈속의 꿈  (0) 2006.03.22
군대의 득과 실  (0) 2006.03.20
Posted by 도그마™
,

올빼미 기르기

롤플레잉 2006. 3. 23. 01:21
올빼미[Korean wood owl]: 올빼미목 올빼미과의 조류

학명Strix aluco
분류올빼미목 올빼미과
생활방식단독 생활
크기몸길이 약 38cm
누런 갈색 바탕에 세로줄무늬
생식난생
서식장소평지 또는 산지 숲
분포지역유라시아 온대지방

올빼미를 기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바사라 때문이다. 그놈의 만화가 아니었던들 그 기분 나쁜 울음소리에다 들쥐나 즐겨 뜯는 맹금류를 애완용으로 길러 보고 싶었겠는가. 카나리아나 잉꼬 같은 새도 싫어하는 내가 말이다. 근데 올빼미에 대해 찾아보니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뭐 올빼미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자. 어차피 나도 조류 농장 같은 곳에서 살 생각은 없다.

아무튼 올빼미에 대해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바, 우선 내 생각보다 이놈의 덩치가 훨씬 크다는 거다. 이래가지고선 바사라처럼 뽀대가 안 난다. 어깨에 한 번 내려앉으면 주인이라는 사람이 중심도 못 잡고 휘청거려서야 이거 어디 폼 잡을 맛이 나겠는가. 새 한 마리 키우기 위해 보디빌딩을 해야 된다면 그것도 좀 우습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놈의 먹이가 마땅치 않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선 좀 고민하다가 결국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묶어 놓고 키울 것은 아니니 혼자서 뭘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지 않겠나. 물론 이렇게 되면 어디 가서 뭘 먹고 돌아왔는데 출처도 알 수 없는 피칠갑을 해 온다든지 했을 때 반겨주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난감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게다가 소위 주인이라는 작자가 아무 것도 해 주는 게 없으면 겉으로야 그렇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날 깔보는 맘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리하여 올빼미 키우는 것이 처음 생각보다는 별로 폼도 안 나고 키우기도 쉽지 않아서 약간 시들해지고 있던 차에, 결정적인 문제를 알아버렸다. 올빼미는 맹금류인데다가 천연기념물이라서 애시당초 집에서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다른 문제쯤은 다 덮어두고 열정 하나로 키울 수도 있었건만 법적인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 나의 로망을 가로막는 이놈의 법률이여...

좋은 세상이 오면 멋지게 한 번 키워 주리라. 올빼미야 그때까지 조금만 참거라.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옛날의 커리큘럼  (2) 2006.03.25
예전에 부르던 노래  (0) 2006.03.24
꿈속의 꿈  (0) 2006.03.22
군대의 득과 실  (0) 2006.03.20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0) 2006.03.18
Posted by 도그마™
,

꿈속의 꿈

롤플레잉 2006. 3. 22. 01:39
가위[명사] 잠을 자다가(잠결에) 무서운 꿈에 질려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답답한 상태.
¶가위에 눌리다.
네이버 국어사전

가위에 눌리는 빈도가 잦아질 때가 있는가 하면 또 한동안 완전히 잊고 살 때도 있다. 고3 때와 불광동 자취방 시절엔 거의 매일같이 가위에 눌려 신음했다.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 보면 확실히 그 당시의 삶 어딘가 한 구석은 어두운 곳이 있었던 것이다. 가위 귀신은 인간의 두려움을 먹고 산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처음엔 가위에 눌린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놀라고 두려운 일이었다. 의식은 또렷하게 돌아왔는데 몸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 내 의지는 잠에서 깨려 하고 있으나 내 몸은 계속 잠으로 빠져드는 상황. 조금만 몸을 비틀면 깰 것 같은데 도무지 힘을 줄 수가 없으니... 하지만 이런 몸서리치는 상황도 반복되면 그럭저럭 참을 만해진다. 아 반복의 위대함이여...

요즘은 가위에 눌리면 우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게 된다. 우선 내가 어디서 자고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고, 현재 내 꿈 속에서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모조리 몰아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잠이 든 자세인데, 어떤 자세인가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몸을 움직여서 가위 상태를 몰아낼 것인지에 대한 전술을 짤 수 있다. 이 때 당황해선 안 된다. 무작정 몸을 움직이려 애써 봐야 괜히 힘만 뺄 뿐이다. 힘을 비축하였다가 리듬을 타면서 결정적으로 몸을 튕겨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서 잠에서 빠져나오려는 때가 정말로 중요한 순간인데, 이때 안심해서 긴장을 풀고 몸에 힘을 빼 버리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된다. 실제로 잠에서 깨었다고 안도하다가 다시 몸을 결박당한 때도 많다.

가위 눌림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꿈속의 꿈, 즉 재귀적 꿈(recursive dream)이다. 꿈 속에서 다시 꿈을 꾸고, 그 꿈 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그 꿈 속에서는 현재가 몇 차원의 꿈 속에 들어와 있는지를 의식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꿈에서 깨는 것을 반복하며 차원을 세어 나간 후 최종적으로 잠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친 후에 가능한데, 이 꿈에서 깰 때는 예외 없이 가위에 눌리게 된다. 내 경험으로 가장 많은 차원은 불광동 시절의 7차원이다. 이런 대박 하나 걸리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한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잠에서 깼더니 그것이 또 꿈 속이었을 때 느끼는 절망감. 이런 상황이 두 번 이상 반복되면 잠에서 깨는 순간에도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물론 이 재귀적 꿈도 위대한 반복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 3차원의 꿈을 꾸었을 때였다. 너무나 오랜만의 재귀적 꿈이라 놀라긴 했지만, 처음 당하는 일도 아닌지라 곧 마음의 안정을 찾고 복잡한 실타래를 풀듯이 한 겹 한 겹 꿈을 벗겨내어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적응이 되어도 잠에서 도망치려는 노력 자체를 꺾은 적은 없다. 사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안 될 때마다 '그냥 관두고 자 버릴까...?' 하는 유혹에 항상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도 아직 한 번도 그냥 자 버린 적은 없다. 여기서 포기해서 잠에게 져 버리면 왠지 모르게 내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거나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서이다. 이 세계에 얼마나 미련이 많아서인지, 도저히 이 긴장의 끈만은 놓아버릴 수가 없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전에 부르던 노래  (0) 2006.03.24
올빼미 기르기  (0) 2006.03.23
군대의 득과 실  (0) 2006.03.20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0) 2006.03.18
교통사고  (0) 2006.03.16
Posted by 도그마™
,

군대의 득과 실

롤플레잉 2006. 3. 20. 01:58
최근에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청년이 군대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를 내게 물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군대를 다녀오는 게 좋은가요, 안 가는 게 좋은가요?"
오늘 내일 하는 사람도 아닌 내게 인생 전체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그 청년보다는 조금 더 살았으니 한 마디 해도 되겠다 싶었다.
"군대가 유익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안 가려고 발버둥을 치겠어요?"
"몸은 좀 힘들더라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얻는 게 많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왜..."
"얻는 게 많다는 그 사람 군대 말뚝 박던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한 번쯤은 경험해볼 만한 거라던데요..."
"그 얘긴 달리 말하면 두 번 다시 하기 싫은 경험이라는 거죠."
"그렇게 되나요..."
이쯤 되면 마치 내가 군생활 엄청 험하게 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미리 말해두지만, 난 객관적으로 군생활 아주 편하게 한 축에 든다. 원래는 특공대로 갈 병력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힘 쓰는 일은 하지 않을 팔자였는지 컴퓨터 특기를 인정 받아 전산병으로 복무했다. 혹시 전산병 하면 밤새도록 워드프로세서 두들기는 행정병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행정병과 전산병은 다르다. 전산병은 독립된 전산실 건물에서 근무하며, 군수자원관리나 일일병력보고, 기타 워게임(가상 전투) 같은 말 그대로 전산 관련 업무를 한다. 말하자면 팔자 좋다는 거다. 일반 행정병 중에는 장교 잘 못 만나 마르고 닳도록 워드만 치다가 급기야 입이 돌아가서 후송되어 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유닉스 장비에서 COBOL이나 SQL 서버 등을 주로 활용하는 일이었다. 업무 환경도 좋아서 여름엔 에어컨, 겨울엔 보일러 난방이 기본이었으며, 남는 시간에는 자유롭게 책도 읽을 수 있었다. 남들은 돈 주고 배운다는 유닉스를 공짜로 익혔으니 나름대로는 군생활 알차게 한 편이다. 물론 나도 사격 훈련이나 혹한기 훈련, 유격 훈련 같은 건 다 받았으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이 시점에서 군대에 대한 오해 몇 가지를 풀고 가자. 군대 가지 말라는 사람들 중에는 군에서 겪는 시련 같은 것은 사회 생활 하면서도 충분히 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군생활 자체가 더욱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군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곳이 군대라서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군대 만큼 혹독하고 극한 상황에 처하는 경험을 얼마나 하겠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부대 내에서는 머리 박기 하면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휴가 나와서 집에서 한 번 똑같이 해 보면 안다. 유격 훈련하면서 지겹게 하는 선착순, 집에서 해 봐라. 그만큼 할 수 있는지...

인생의 황금기에, 한창 공부하고 생산적인 일을 할 시기에 군대 같은 곳에 가서 2년을 허비하고 오는 것이 정말 아깝다는 사람도 많다. 이런 논리도 자신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만이다. 방학 때 책 한 권 읽지 않고, 휴일에 공부 한 자도 안 하는 사람들이 꼭 이런 얘기한다. 남들 다 허비하는 2년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면 뭐 큰 일이라도 할 것 같지만, 내가 알기로 군대 안 간 사람 중에서 그동안 뭔가 이루어낸 사람 하나도 없다.

소중한 사람들과 2년 동안 떨어져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 군대 가서 첫 휴가 나오면 친구들 모두 반긴다. 하지만 휴가나 외박이 잦아질수록 친구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휴가가 시험기간에라도 걸리면 차라리 부대에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롭다. 2년은 정말 금방 간다. 물론 부대에 갇혀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밖에 있는 친구들은 휴가 자주 나오는 군인들 정말 싫어한다. "너 또 나왔냐?" 이런 소리 의외로 자주 듣는다.

아니 그렇다면 군생활 동안 얻는 건 있고 잃는 건 별로 없으니 군대 다녀오는 게 좋다는 얘기 아닌가? 끝까지 들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안 가는 게 훨씬 좋다. 왜냐하면 군생활 동안 아주 필요 없는, 아니 배워서는 안 될 것을 하나 배워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강자에 대한 굴종'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해지는 것. 멀쩡한 청년들이 군대에서 이런 걸 배우기 때문에 내가 군대 안 갈 수 있다면 절대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등병때엔 누구나 서럽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부당한 이유로 신체의 구속을 당한다. 게다가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이 올라가면 스스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으로 자신에게 권위가 주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를 계속적으로 보장 받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상급자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흘러가고 언젠가는 내가 저 정점에 우뚝 설 수 있는 날도 오는 것이다. 이는 정말 민주사회에서는 불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독이 되는 경험이다. 아주 짧긴 하지만 노예제나 봉건제의 맛을 보고, 그것이 군림하는 자나 그것에 기생하는 자에게 얼마나 달콤한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긴 군대야말로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계급사회이니...

그렇다고 편법을 써서라도 군대를 다녀오지 말라는 얘긴 아니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안 갈 수만 있다면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럼 이 나라는 누가 지키냐고? 누군가는 조국의 영토를 수호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난 애국자 아니다.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빼미 기르기  (0) 2006.03.23
꿈속의 꿈  (0) 2006.03.22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0) 2006.03.18
교통사고  (0) 2006.03.16
심리학의 악몽  (0) 2006.03.15
Posted by 도그마™
,
싸이월드 연세대학교 클럽에 한 연극에 대한 소개글이 올라왔다. 연극의 제목은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란다.

그런데 이 소개글의 내용이 참 웃긴다. 아니 헌책방이라니... 이 글을 쓴 사람은 <오늘의 책>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까? 이래 놓고서도 연대생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나올까? 옛 주인인 성식 형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제발 소개한 사람이 이 연극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갑자기 <오늘의 책>에서 허리 두들겨 가며 황석영의 '장길산'을 보던 시절이 그립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속의 꿈  (0) 2006.03.22
군대의 득과 실  (0) 2006.03.20
교통사고  (0) 2006.03.16
심리학의 악몽  (0) 2006.03.15
벼랑 끝으로 몰기  (0) 2006.03.15
Posted by 도그마™
,

교통사고

롤플레잉 2006. 3. 16. 02:10
운전이 정말 두려울 때가 있는데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침에 외가에 맡긴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곧 떨쳐 버리고 시동을 걸었다. 저녁 7시가 지나 거리엔 이미 어둠이 내렸다.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돌아가는 순간 정면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질주해 왔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경적을 울렸다. 식은 땀이 흘렀다.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잠시, 가로등이 희미한 신사동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중앙선 건너편에서 허연 물체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강아지임을 직감하고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차 밑으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강아지가 빨려들어갔다. 꽤나 속도를 내고 있던 터라 차는 강아지를 치고도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너무나 놀라 차를 세우려 했으나 이미 뒷차들이 현장을 덮어버린 후인 데다가 나더러 빨리 가라고 전조등을 깜박인다. 사람을 친 것도 아닌데 뭘 망설이냐는 분위기다.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놈의 강아지가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영 개운치가 않다. 오늘따라 이 동네 사람들이 뭐에 씌었는지 그 후로도 처가에 도착하는 동안 몇 번이나 내 차 앞에서 무단횡단을 했다. 어떻게 처가에 도착했는지 잘 모르겠다. 딸을 데리고 돌아올 때엔 다른 길을 택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다시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음엔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일 수도 있다.
강아지가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빈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대의 득과 실  (0) 2006.03.20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0) 2006.03.18
심리학의 악몽  (0) 2006.03.15
벼랑 끝으로 몰기  (0) 2006.03.15
자기소개서  (0) 2006.03.13
Posted by 도그마™
,

심리학의 악몽

롤플레잉 2006. 3. 15. 18:17
같은 과 1학년 전원이 듣는 수업이라길래 덜컥 따라 수강 신청을 한 것이 '심리학개론'이라는 과목이다. 근데 첫 수업 시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이 과목을 17년 전에도 들었던 것이다. 그 때엔 '인간 행동의 심리적 이해'라는 이름으로 들었다.

당시에도 심리학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오해 때문에 그 과목을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나 사회학에 가깝다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심리학은 접해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만, 최소한 개론 만큼은 철학보다는 생물학에 가깝다. 아니 왜 선생님은 그 얘기를 수강신청 변경 기간 전에 얘길 해 주지 않는 것인가. 변경 기간 다 끝나서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에 와서 "사실 심리학이란 이러이러한 거다." 라고 얘기해 줘 봐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첫 수업의 본격적인 내용도 낯설지가 않다. 구조주의, 기능주의, 행동주의, 인지주의 등의 제반 심리학의 접근 방법이 소개되었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해서 완전히 까먹고 있던 내용도 뇌의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 다시 들어보니 슬글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근데 예전 기억이 점점 더 또렷해질수록 이게 전혀 기쁘지가 않다. 그 당시 난 생물학을 닮은 심리학의 실체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이후로는 수업을 거의 모두 빼먹어 버렸으며 나중에 받은 학점도 1학년 1학기의 유일한 'D'였던 것이다.

나쁜 일은 되풀이된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0) 2006.03.18
교통사고  (0) 2006.03.16
벼랑 끝으로 몰기  (0) 2006.03.15
자기소개서  (0) 2006.03.13
꿈 속의 법주사 기행  (0) 2006.03.11
Posted by 도그마™
,
해야할 일을 여유 있을 때 미리 끝내 버리는 유형의 사람이 가끔씩 있는데 바로 내 아버지이다. 가까이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삶이 꽤 피곤해진다. 당연히 당신의 아들이랑 이 문제에 대하여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굳이 아버지로부터 욕을 먹어서가 아니라 준비성 있게 미리미리 할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흉내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기한이 다 되어 마지막 순간에서야, 벼랑 끝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일이 된다. 명을 깎아 먹는 짓이라는 거 다 안다. 그렇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미리미리 하면 누가 손모가지를 꺾어놓는 거 절대 아니지만, 매번 이렇게 마지막에 몰릴 때마다 자괴감이 들지만,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해야 할 일 중에서도 특히나 부담 혹은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기획서 같은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첫 직장의 월말 결산 작업 같은 것도 절대 미리 해 본 적이 없다. 기획서야 얼마나 걸릴지 깜냥이 안 되는 고로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시작하게 되지만, 월말 결산이야 말로 궁극의 벼랑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자료 정리에서부터 스프레드 시트에 입력, 자료 수정, 보고 자료 출력 까지, 이런 판에 박힌 일상적인 업무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통빡이 나오기 때문이다. 보고해야 할 전날 야근할 때면 언제나 든든히 먹고 밤을 꼬박 새울 각오를 했다. 어차피 미리 해 봐야 손에 잡힐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사는지 그때마다 회의가 든다.

2주 전에 과제를 받았다. 이번만큼은 미리 해치우고 싶어 책도 미리 다 읽어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 없이 마감 전날이 되었다. 그냥 체념하고 이렇게 살자.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내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나라는 인간은 절대 미리 해 놓는 법은 없어도, 꼭 해야 하는 순간엔 그래도 어찌어찌 다 하긴 하잖는가 말이다.

근데 지금 이렇게 과제 대신 다른 글이나 쓰는 걸로 보아 아직 벼랑 끝은 아닌가, 혹은 이것도 점점 내성이 생기는 것인가...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통사고  (0) 2006.03.16
심리학의 악몽  (0) 2006.03.15
자기소개서  (0) 2006.03.13
꿈 속의 법주사 기행  (0) 2006.03.11
도그마, 도서관에 가다  (0) 2006.03.09
Posted by 도그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