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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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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요한복음」 1장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이 교회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곳은 분명 교회였다. 비록 정면에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간혹 다른 곳에서 그것을 대신하기도 하는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것도 없었지만, 누가 옆에서 이곳을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한눈에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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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십자가를 대신하는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교회에서 일반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제껏 그런 교회를 딱 한 번 보았을 뿐이다.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성남교회라는 곳인데, 언제, 왜 그곳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다. 아마도 그 교회의 총동원 전도 주일에, 말 그대로 동원되어 간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어쨌거나 그 교회에서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 같은 건 오래 전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머리 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교회의 자랑인 스테인드글라스이다. 교회 바깥으로 부터 들어오는 햇살이 색유리를 통해 걸러지면서 눈을 힘들게 하지 않을 정도로 은은하고 안온한 빛으로 바뀐다. 그림의 내용은 어린양을 안고 있는 예수의 모습인데, 한마디로 장엄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편안한 느낌.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시 한번 그곳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시 아까의 교회로 돌아오자면, 아무튼 그 교회는 객관적인 정황으로는 교회라 할 만한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는 성가 반주용 피아노도 없다. 푸른 빛이 감도는 옅은 회색의 콘크리트 방. 밖으로 나 있는 흔한 창문도 없었고 오직 등 뒤의 출입문 말고는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다. 조그만 방은 아니고 약간 작은 규모의 강당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곳엔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다. 그럼 의자 없이 어떻게 예배를 보는가. 여기선 모두들 서서 예배를 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불편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여긴 원래 그런 공간이니까. 그 대신 이 공간을 다른 곳과 구별시켜 주는 장식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면과 좌우의 세 벽에 걸려 있는 전광판이다. 아직 전원이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예배에 필요한 것은 확실하다. 저 전광판은 이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시간은 저녁 무렵이다. 배가 약간 부른 걸로 보아 조금 전에 저녁식사를 마친 듯하다. 물론 벽에 시계도 걸려있지 않은데다가 창문도 없으므로 시간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때가 저녁이라는 믿음을 철회할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말하지 않아도, 옆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저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적당한 피곤함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침이나 낮이라면 이보다는 훨씬 몸이 가뿐하리라. 그렇다고 해서 몸이 불편하거나 서 있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몸의 상태는 분명 하루를 마감하는 그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이 시공간으로 소환된 걸까. 이 교회까지 걸어온 기억은 전혀 없다. 다른 공간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장면 전환이 이루어졌고, 주위 사물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예배 시간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걸로 미루어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장면들이었다. 난 이미 이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그것도 신참은 아니리라.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위에 아무도 아는 얼굴이 없다는 점. 그렇다. 모든 것이 내집처럼 편하고 익숙하긴 한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가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낯설게 대하거나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들과 무슨 말을 해 본 것도 아니다. 사실 모두가 선한 웃음을 띠고 있을 뿐, 서로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서서 곧 시작될 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창시절의 아침 조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정경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곧 목회자가 들어와서 정면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내가 이 교회 신도 맞나? 목사는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었으나 호감을 주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염은 말끔하게 깎았고 머리카락은 짧게 잘랐다. 얼핏 보면 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배와 무너져가는 턱선은 가릴 수 없었다. 그래도 평소 어디서 운동이라도 꾸준히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체적으로는 균형 잡힌 몸매를 자랑했다. 입고 있는 양복도 그만하면 훌륭하다. 흰 셔츠에 넥타이는 메지 않았으나 그것이 단정하게 보이지 않는 건 아니고 오히려 이 자리를 편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교회에 소환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도 어떤 안내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신앙고백도 없었고 찬송도 없었다. 물론 기도도 없었다. 그러면 바로 목회자의 설교로? 그것도 아니다. 이 교회는 다른 곳과는 예배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그동안 꺼져 있던 전광판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목사의 역할은 아주 단순했다. 예배를 인도하는 역할이 그것인데, 그게 초등학교 체육교사보다도 더 쉬운 일이었다. 그냥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향만 지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른쪽으로!”, “정면으로!”, “자 이젠 왼쪽으로!” 라는 목사의 지시에 따라 모두들 서 있는 자리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 눈앞의 전광판에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낱말 또는 그에 준하는 복합어가 표시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리내에 힘차게 읽었는데,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음악 시간처럼 서로 입을 맞추어 읽었다. 목사의 인도에 따라 방향을 돌릴 때까지. 그리고 다른 건 없었다. 그게 다였다.

처음에는 좀 우스웠다. 나도 사람들 틈에서 함께 그 낱말을 읽었지만 “무슨 놈의 예배가 이런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런데 그게 이 예배의 매력이었다. 일단 다른 교회처럼 목사의 따분하고 뻔한 설교를 꾸벅꾸벅 졸면서 들어주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단순 반복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늘’이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여러 사람이 입을 맟춰 큰 소리로 말하다 보면 뭔가 모르게 그 낱말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나 필요성 등 알 것 같았다. ‘하늘’, ‘공기’, ‘바닥’, ‘평등’, ‘평화’… 평소에는 무심코 사용하던 말이었데. 그런데 이렇게 천천히 소리내어 읽어보면, 그간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친해진 사람들과 같다고나 할까. 마치 2학년 때까진 같은 과라도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할 뿐 그 외에는 거의 깊은 얘기를 안 하다가, 제대 후 복학해서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 같은 거 말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한동안 흘러갔다. 사람들의 감정은 제시되는 낱말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져 갔다. 행복감을 주는 말이 나타나면 그에 따라 사람들도 웃고, 슬픔을 물고 오는 낱말이 나타나면 그에 따라 기분도 떨어졌다. 처음에는 두 음절의 낱말이 제시되었으나 나중엔 형용사와 명사의 쌍으로 이루어진 말이나 복합어들이 나왔다. ‘새엄마’, ‘옷가게’, ‘아름다운 아침’ 같은… 이때까지는 아주 만족스러운 예배라 할 수 있었다. 세상엔 이런 예배도 있구나. 이 얼마나 충만한 저녁인가. 그런데 목사가 다시 왼쪽 벽으로 우리를 인도했을 때였다. 그때 전광판에 나타난 말은 바로 ‘봉급생활자’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면서 온몸이 얼어버렸다. 그와 함께 목구멍에서 무언가 뜨겁게 올라왔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봉급생활자, 봉급생활자, 봉급생활자…” 큰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들 괴로워했다. 무릎을 꿇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아 우리가 이렇게 나약한 존재였던가. 봉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나. 저 말 한마디에 마치 십자가와 마늘을 본 흡혈귀들 마냥 모두들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이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아!” 두 눈엔 힘없는 눈물이 흘렀다.

———

이렇게 괴로운 맘으로 잠에서 깼다. 사실 최근의 꿈도 아니고 몇년 전의 것인데다가,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통해서도 말한 바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이 또한 곧 망각의 강을 건널 것이 틀림없기에 오늘 몇 자 적어둔다.

근데 교회 다니냐고? 유물론자에게 그런 거 물어보면 실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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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분류없음 2013.02.09 02:46
불 끄고 자리에 누웠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이대로 그냥 자 버리면 내일 아침 일어나서 분명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간략하게나마 메모해 놓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 보니 생각이 정리되기는 커녕 이리저리 마구 흩어질 뿐만 아니라, 그나마 간신히 부여잡은 파편들도 누워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시시하고 재미도 없고 별로 쓸모도 없을 것 같다.

괜히 눈만 따끔거리고 아까운 시간만 버리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수면 시간을 침탈 당한 것 같아 심히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잠시, 뭔가 모르게 이런 게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는 시덥잖은 생각으로 약간 행복해졌다.

결론적으로 별로 기분 나쁘지 않게 잠자리에 들 것 같다. 중간에 깨지만 않는다면 거의 완벽한 밤이리라.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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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골드바흐의 추측』 이후 실로 십수 년 만에 읽는 수학소설―물론 이런 장르도 있다면―이다. 이런 소설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심지어 나 몰래 영화까지 나온 걸 보면, 그 영화 어지간히 못 만들었나 보다.

수학을 소재로 한 글은 내게 즐거움과 동시에 약간의 괴로움을 함께 가져다 주는데,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도중에 자꾸 곁길로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소설 초반부터 친화수親和數(우애수友愛數)가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둘러가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다. 이제껏 알려진 가장 작은 친화수인 220과 284가 나왔는데, 다른 친화수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짐과 동시에 그것을 구하는 알고리즘을 머리 속에 그려 보기 시작했다. 우선 주어진 수의 약수를 구해야 하고, 그 약수들의 합을 통해 반대편 수가 만들어지면 그 수의 약수와 그 합을 구해서 원래의 수와 비교하고… 이 정도면 괜찮았는데, 곧이어 1부터 1억까지의 자연수 중에서 소수素數(prime number)의 개수를 구하는 함수를 만들어야 했다. 5761455개가 바로 그 답이라는데, 이걸 그냥 믿으면 되겠나. 직접 구해 봐야지 않겠나. 예전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분명히 C나 파이썬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하더라. 다행히도 그 이후에는 특별히 옆으로 샐 만한 거리가 없었다. 후반부의 오일러의 등식 빼고.

등차수열의 합을 구하는 공식이 등장하는 부분을 읽을 땐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3학년 때가 떠올랐다. 사실 이 공식을 생각하면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10살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등차수열의 합, 정확히 말하면 1부터 10까지의 합을 구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내가 이루어낸 첫번째 수학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 없이 무심히 흘러가던 10살의 어느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때 우리집에 한 서적 외판원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어린이용 학습만화나 백과사전류의 책들을 팔러 다니는 외판원이 많았다.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조기 수학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정열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내게 제시한 문제가 1부터 10까지의 합 간단히 구하기였다. 듣는 순간엔 막막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도전 과제는 한 가지 맹점이 있는데, 도전자로 하여금 "여기엔 반드시 간단한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내가 이 아저씨를 통해서가 아니라 방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주제를 생각해 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박사의 말처럼 답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어려운 법이지, 답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문제는 하나도 어려운 게 없다. 그런 면에서 내가 나름 눈치가 전혀 없진 않았나 보다. 분명히 존재하는 법칙을 이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잠깐 동안 그 수들을 빤히 노려보았더니 역시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1과 10의 합과 2와 9의 합이 같음을 발견한 것이다. 3과 8, 4와 7, 그리고 남은 것은 5와 6 쌍. 정답은 11 × 5 = 55. 짜릿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1부터 100까지의 합도 두렵지 않다. 주어진 수열의 처음과 끝을 더한 값에 수열의 개수를 2로 나눈 값을 곱해 주면 된다. 수열의 개수가 홀수인 경우엔 중앙값을 제외했다가 나중에 따로 더하면 되고. 당연히 주어진 문제를 풀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외판원 아저씨는 "아드님이 참 똑똑하시네요" 라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남기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서야 했지만, 그날 내가 얻은 작은 수학적 성공을 도와주신 그 아저씨가 없었다면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등차수열의 합이 내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삶은 대체 어떤 것일까. 아무리 내가 지금 머리 속으로 그려 본다고 해도 실제로 그 상황 속에 놓이지 않는 이상 박사의 삶을 완전히 공감하긴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메모해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곧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 일어나면 자신이 처한 상황부터 다시 인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즉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부터 맨 처음으로 숙지하면서 하루를 절망 속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게다가 매일 메모가 쌓인다면 일어나서 한숨 한번 쉬고 곧바로 그간의 메모들을 죄다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내게 왜 이런 형벌이 주어졌는지 한탄하기도 바쁜 와중에 그 많은 메모들이 머리 속에 들어오겠으며, 또 그 정보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을까. 그뿐만 아니라 주어지는 정보는 날이 갈수록 불어날텐데 말야.

사실 소설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그리 칭찬해 주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우선 박사와 그의 형수와의 관계가 별로 매끄럽지 않다. 정지한 시간 속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거창한 관계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수가 등장하는 분량은 민망할 정도로 적다. 아님 말고 식으로 감히 넘겨짚자면, 박사와 형수의 이야기가 잘 전개되지 않아, 소설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작가가 그 부분을 통으로 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박사가 사랑한 수식', 즉 오일러의 등식이 주는 임팩트도 좀 부족하다. 소설이 이 수식의 아름다움을 과연 얼마나 제대로 표현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박사가 그 순간 왜 이 수식을 내밀었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강하지 않다. 물론 이 부분이 작자로서도 어려웠을 터인데,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는 순간 독자들의 책 덮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결정적으로 이 책에서 맘에 안 드는 것은, 왜 박사가 유독 아이들에게는 관대하고 친철하고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엔 누가 옆에서 말 거는 것도 싫어하고 밥 먹는 것도 거르는 사람이 파출부의 아이만 나타나면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 헌신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아이에 대한 특별히 좋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박사가 기억하는 것은 파출부에게 열 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다는 정도 아니던가.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좋아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박사가 가진 격려의 힘 때문이다. 수학에 관한 아무리 작은 문제 제기라도, 아무리 사소한 성취라도 절대 놓치는 법 없이 무한히 격려해 주는 박사의 품성, 성급하게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들은 애 키우는 부모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말은 쉽지만 행동하긴 쉽지 않다는 게 여전히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은 몇 번의 이사 중에 잃어버렸다. 일부러 버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아까웠던 기억도 없다. 재밌게 읽었으나 또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소설. 그러나 이 책은 소장하고 싶다. 나중에 다시 읽고 싶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딸이 이 책을 보고 수학에 조금은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부모의 욕심에…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봐도 아동문학은 아닌데 딸에게 읽히는 건 좀 아닌 듯하다. 관심을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고. 정말로 욕심은 욕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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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은 매일 이렇게 눈이 왔으면 좋겠단다. 그러고는 등교길에 부츠 안으로 눈이 들어오는데도 쌓인 눈을 밟으며 나간다. 엄마 아빠는 사양한다고 말했더니 물론 이해는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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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동으로 이사와서 나빠진 것은 교통편이고 좋아진 것은 도서관이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그래 봐야 집에서 걸어다니기에는 거리가 좀 되지만, 주위에 아예 그런 게 없는 신사동에 비하면 삶의 질이 조금은 높아졌다고 하겠다.

오랜만에 햇빛도 쨍한데다가, 2주 전에 대출한 책도 반납하고 다른 책도 업어오려고 어제 큰딸과 집을 나서는데 작은딸이 자기도 도서관에 가겠단다. 몇 번 데리고 갔으나 도통 책에는 관심이 없고 먹을 거나 사 달라고 조르는 작은딸은 어지간하면 엄마와 집에서 놀다가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간에서 합류하여 짚앞 놀이터에서 놀면 어떨까 했는데, 언니와 아빠가 현관문을 나서는 것을 보더니 대성통곡을 하면서 거실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어쩌겠나. 데리고 가야지. 결국 애들 엄마까지 따라 나서서 온 가족이 도서관으로.

역시나 작은딸은 책에 관심이 없다. 책 읽는 언니 옆에서 이것저것 간섭해 보는 것도 잠시, 좀 있으니 도서관을 뛰어다니기에 바쁘다. 하긴 아직 글도 모르는데 엄마 아빠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가.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만이라도 익숙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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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기형도의 말마따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떨어진 영수증도 종이는 종이다. 오늘 버릴 책들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1992년도 6월자 PC통신 요금 납부 영수증. 나에게 터보-C 책은 타임캡슐이었구나. 내 기억이 맞다면 이때가 아마도 코텔에서 하이텔로 서비스 이름이 바뀔 때가 아닌가 싶은데… 아무렴 어떠랴. 하이텔, 나우누리 모두 사라지고 이제 이 영수증만 남아서 그때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찍힌 도장도 지금은 없어진 한일은행 연세지점이네. 납입기한을 열흘이나 넘겨서 납부한 걸로 보아 며칠 동안 접속을 못했을 듯.

누군가는 촌스럽게 ID를 모두 대문자로 썼다고 놀렸지만, 이것은 BASIC 프로그래밍의 전통이라고 감히 우기고 싶다. 요샌 그때처럼 겁도 없이 전화비 아까운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채팅할 사람들도 없거니와, 그런 공간이 생긴다 해도 열정과 체력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영수증, 책과 함께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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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책들

분류없음 2013.01.2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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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사 통에서도 살아남았으나 그 후로 일 년이 넘도록 박스 속에서 잠자던 책들이 이번에 아내의 준엄한 검열에 걸려서 방출 통보 받음. 나로서도 이젠 할 말이 없다. 그동안 이런 책들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으며,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마당에 이들을 구제해 줄 명분이 없다. 하기야 지금 살펴보니 내게 FORTRAN, COBOL 책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터보 C, 파스칼 책들도 가지고 있었네. 그리하여 예전에 동철이 형이 준 진드리히 젤레니의 『맑스의 방법론』을 포함한 18권의 책을 이번 주말에 일괄 퇴출하기로 전격 결정. 그래도 그동안의 정리情理를 생각해서 기념사진 한 컷 남긴다.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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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손이 저려서 눈을 뜨니 새벽 5시 30분. 왼손이 배 밑으로 들어가서 고생 좀 했다. 어지간하면 이렇게 잠을 깨는 일도 없을텐데 몸살 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의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듯. 아무튼 이렇게 그만 잠이 깨 버렸다. 새벽 시간에 딱히 할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운동하러 밖에 나가자니 너무 춥고 어제 얻은 감기 더 신나서 날뛸까 심히 저어하다. 어쩌겠나. 책이나 봐야지. 그리하여 밖에 나가는 대신 실내자전거 위에 몸을 싣고 펼친 책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되시겠다. 언제 한번 꼭 봐야지 하면서도 이제껏 다른 책들한테 밀려서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더니 이렇게 달밤에 체조하는 격으로라야 간신히 읽을 기회를 잡는 것인가.

예전에 알뛰세, 발리바르 등에서 이미 질려 버렸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왜 글을 이 따위로 쓰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들의 재미없는 글쓰기 전통의 연원은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 간단하고 재밌고 알아듣기 쉽게 글을 쓰면 인정받지 못하는 지적 전통이라도 있나. 왜 한 문장을 써도 꼭 이렇게 중간에 주석과 수식어를 겹겹으로 넣어가면서 문장의 주어와 술어가 뭔지도 헷갈리게 만드는지. 그게 아니라면 혹시 불어와 한국어 사이의 궁합지 맞지 않아서인가. 불어는 영어나 독일어와는 달리 번역하는 데에 구조적인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닌지. 김화영 선생의 번역문학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야.

아무튼 애초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도 아니었지만, 마지막엔 기분이 좀 더 꼬인 상태로 책을 덮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몸은 점점 깨어나는데 책읽기는 영 따분하기 그지없다. 이제부터 새벽에 프랑스 사람이 쓴 책은 피해가야 될까. 근데 그럼 『증여론』 저 책은 언제 보나.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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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몸살

분류없음 2013.01.26 20:35
어젯밤 몸상태가 수상하더니 오늘은 종일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금방이라도 공중부양할 듯한 이런 느낌, 정말 싫다. 약을 먹었으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내일 아침 일어나면 멀쩡해져라, 제발…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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