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대본소에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리를 소재로 한 박원빈의 만화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요새도 만화 그리는지는 모르지만 한때 하드보일드 깍두기 만화로 유명했던 그 박원빈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만화 자체도 그다지 감명 깊을 리 없는고로 전체 줄거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머릿속에 한 장면이 뚜렷이 남아있다. 공간적 배경과 주인공은 박원빈 류의 만화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일본과 제일동포다.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요리사 세계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제일동포의 삶을 그린 만화였던가. 아무튼 주인공은 일본 최고의 요리사인 일본인 스승 밑에 들어가서 테스트 과정을 거치고, 그 밑에서--박원빈 만화가 늘 그렇듯이--주인공만 없었으면 멀쩡히 행복한 삶을 누렸을 일본인 라이벌과 경쟁하며 요리 수업을 받는다.

    어느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각자 제일 자신 있는 일품요리 하나씩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이 때 우리의 주인공이 만든 것이 잉어탕인데, 그 때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조밥을 지어 잉어탕과 함께 내놓았다. 스승이 왜 쌀밥이 아닌 조밥을 지었냐고 묻자, '그냥 잉어탕에는 조밥이 어울릴 것 같아서 지어보았습니다.'라고 말한 주인공. 스승의 입에서 감탄과 함께 칭찬의 말이 쏟아졌다. '역시 자네는 천재야 천재. 잉어탕에는 조밥이 제격이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아도 감으로 알아내다니...' 역시 결론은 주인공이 하늘이 내린 잘난 놈이라는 거다.

    아니,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글이 이렇게 옆길로 샜는지...
그렇다. 잉어탕에 조밥이 어울리는 것처럼, 즉 요리에도 궁합이 있는 것처럼, 특정 사건에도 자주 쓰이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요사이 현장검증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주 생소한 말은 아니지만, 2008년 들어 근자에 흉흉한 사건들이 많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빈도가 올라갔으리라. 그런데 TV나 신문에 현장검증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거의 반드시, 마치 바늘 가는 데에 실 가듯 따라오는 말이 있는데 바로 '태연히'라는 말이다.
현장검증에서 피의자 OO씨는 태연히 범행 과정을 재연하였습니다.
피의자 OO씨는 태연히 범행 과정을 재연한 뒤에...
모자에다 마스크를 쓴 OO씨는 범행 일체를 태연하게 재연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말은 아마도 '담담하게', 또는 '묵묵히'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아마도 시청자나 독자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에 이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파렴치한 범인--엄밀히 말하면 피의자 또는 용의자--이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범행을 재연하였다는 얘길 들으면, 누가 분노에 떨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좀 그렇다. 아니, 현장검증을 태연하게 하지 않으면 대체 사람들은 범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그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통곡이라도 하라는 걸까. 현장검증은 이미 범행의 순간이 아니다. 범인이 체포되어 조사 받는 과정에서 이미 몇 번은 되풀이하여 얘기한 것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범행 순간의 긴박함이 있다면 몰라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범인들이 현장검증시에 보일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수사에 대한 협조와 이후 공판 결과의 함수관계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을까.

    사실 현재의 현장검증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행 검증 방식은 사건이 벌어진 곳의 주민들이 주욱 둘러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게 과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인가. 물론 여기서 피의자의 인권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현행 방식은 마치 북한의 공개 즉결처분과 같은 분위기 아닌가. 어차피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을텐데 꼭 그렇게 한 장소에 다같이 모여서 분노를 표출해야만 하는 걸까. 마치 ritual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도 답답한 일이지만...

    태연한 현장검증,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아니면 기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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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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