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유머일번지'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던 고전 코미디 소재의 하나가 바로 '김 수한무(金 壽限無)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손이 귀한 집에 어렵사리 얻은 자식이라 장수하라는 뜻에서 거창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름을 줄여서 부르면 장수 효과가 사라진다는 작명가의 말 때문에, 물에 빠진 아들을 이름만 부르다가 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반 친구들이 저 긴 이름을 굳이 공책에 적어주었다. 마치 시험이라도 볼 것처럼 모두들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암기했다. 당연히 성적이랑은 관계 없었고, 저런 거 잘 외운다고 머리가 좋아진다는 보고도 들은 바 없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읽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맘먹고 있던 참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아마추어의 잡설로 만들어 버린다는, 이슬람 아니 인류 최고의 여행 문학이라는 수식을 항상 달고 다니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 이븐 바투타는 중세의 세계적 대여행가이며 탐험가다. 그가 3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을 오가며 보고 들은 것을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원제는 좀 긴데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 보록(寶錄)'이라는 다소 따분한 제목이다. 저자가 메카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길 떠난 김에 이슬람 세계 곳곳을 돌아보고 싶어 3대륙을 30년에 걸쳐 돌아다녔다. 또라이짓도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강한 인상을 남기는 법이다. 방랑길 27년째 되던 해 드디어 술탄 아부 아난의 눈에 들어, 술탄의 후원 아래 여행을 마치고 여행기를 쓴 것이다.

그런데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소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건 어느 정도 봐 줄만 한데 아랍인들의 이름은 정말 살인적이다. 저자인 이븐 바투타만 해도 그렇다. 이 사람의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압둘라 븐 무함마드 븐 이브라힘 알 라와티'다. 욕이 안 나오면 비정상이다. 여행기 전체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름이 이러하다. 잠깐 인용을 하자면,

... 한사람은 투니쓰 시의 혼인전담법관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아비 바크르 븐 알리 븐 이브라힘 앗 나프자위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건한 샤이흐이자 마흐디야 해안의 한 농촌 출신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후싸인 븐 압둘라 알 까르시야 앗 자비디야인데, ...

내가 입성했을 때의 튀니지 쑬퇀은 쑬퇀 아부 야하이 이븐 쑬퇀 아부 지크리야 야하이 이븐 쑬퇀 아부 이쓰하끄 이브라임 이븐 쑬퇀 아부 지크리야 야하이 븐 압둘 와히드 븐 아부 하프쓰--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였다.
숨찬다. 대체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열흘 기한으로 대출한 책인데 아무래도 몇 장 못보고 반납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 이름에서 걸리다니...

제발 알라의 은총으로 이 동네 사람들 물에 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롤플레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프라인  (0) 2006.05.08
한 시간 일찍...  (0) 2006.05.02
가장 힘든 한 주  (0) 2006.05.01
동물성 단백질  (0) 2006.04.24
여행을 떠나고 싶다  (0) 2006.04.22
Posted by 도그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