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롤플레잉 2006. 4. 10. 11:48
지난 겨울에 자다가 속이 쓰려 벌떡 일어났을 때 아무래도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사는 명동 근처 백병원에서 받았는데 물론 삼성병원보다는 한 단계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게 해 놓았다. 마침 검사하는 날 함박눈도 내리고 해서 생각지도 않던 분위기 있는(?) 병원행이 되었다.

종합검진이긴 하지만 이번엔 특정 부위, 즉 위장이 아파서 받은 검사였으므로 아무래도 문진할 때 위장 관련 얘기를 많이 하기도 했고, 나 자신으로서도 내시경 검사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다른 검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청력검사를 하러 작은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처음 하는 검사도 아니고 해서 마음 편하게 먹고 있었다. 헤드폰을 끼고 소리가 나는 쪽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검사였는데, 이상하게도 오른쪽만 계속 검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간호사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이윽고 간호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하는 말이,
"왼쪽은 안 들리세요?"
"예? 왼쪽도 했어요?"
"어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
"다시 한 번 해 볼게요."
다시 검사를 시작했으나 여전히 왼쪽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래도 안 들리세요?"
"예..."
"좀전에도 검사했는데..."
왼쪽 청력이 약해진 것도 아니고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순간 머리 속에 '아 드디어 나도 정말로 내리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몸의 어느 한 부분이 고장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몇 초 사이에 갑자기 나이를 먹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제 얼마 안 가 다른 곳도 이상이 생길까. 좀 있으면 눈도 침침해 질까. 이제부턴 재생도 안 된다던데... 남은 인생을 귀머거리로 살아야 하나...

근데 이쯤에서 뭔가 의문점이 생겼다. 아니 여지껏 귀머거리가 되도록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한쪽 귀를 막고 검사를 해 본 적은 없으나 이 정도라면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약하게 들려야 정상 아닌가. 간호사가 기계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더니 조금 후 돌아왔다. 고장이란다. 아휴~ 간 떨어질 뻔했잖아. 하필이면 내가 검사할 때 고장이 나서 사람 놀라게 하다니...

돌아오는 목요일에 치과에 간다. 어금니에 금을 입히는 날이다. 나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줄로만 알았던 일들이 점점 나에게 생긴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거울을 보면 새치가 하나둘씩 늘어간다. 기억력도 떨어진 것 같아 슬프다. 내가 아기를 낳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갑자기 이러는 건지...

영원한 젊음은 없겠지만 막상 예전같지 않으니 건강, 젊음 같은 단어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운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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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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