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시험지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는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면에서 오픈소스(open source) 게임은 항상 스포일이나 해킹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존은 어려운데다가 그 해결책은 뻔히 알고 있는데 어떻게 소스를 들여다 보거나 뜯어고치거나 매크로를 돌리지 않겠는가. NetHack(Slashem), Angband 패밀리, Dungeon Crawl 등의 주옥같은 게임에서 좌절하는 이유는 몬스터가 너무 강해서이거나 퀘스트가 너무 어려서워가 아니라, 그놈의 해킹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서 자멸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큰 해킹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극초반에 너무나 쉽게 죽는 걸 조금이라도 방지하고 싶어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방어구와 무기 등을 업그레이드 시켜 주고, 로그류(roguelike)에서 초반에 가장 괴로운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량을 넉넉하게 채워 주는 것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이는 마약과 같아서 이내 만족하지 않게 된다. 아니 무기도 올렸는데 스펠도 적당히 갖춰야 되는 거 아닌가. 랜턴이 없어 캄캄한 동굴을 못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티팩트까지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히 게임 밸런스는 무너지고 그 때부터는 게임의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나중엔 족보에도 없는 무시무시한 대량학살(genocide)이나, 던전 한 층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대지진 같은 마법주문까지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놈의 게임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무리 해킹으로 능력치를 올렸다 해도 보스가 있는 던전 몇 십 층에선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무너진 밸런스를 참는 이유는 그나마 보스라도 때려잡기 위함인데 소원 성취도 못하고 지하감옥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역시 캐릭터의 능력치와 게이머의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센스는 개떡같지만, 개발자가 오픈소스로 풀겠다고 해 놓고 배신을 하는 바람에 더욱 괘씸하지만, ADOM(Ancient Domains of Mistery) 같은 게임이 어떤 면에서는 안전하게 재미를 보장한다. ADOM은 그 자체로도 아주 잘 만들어진 로그류 게임이지만, 소스가 열려있지 않기 때문에 해킹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게임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편법은 쓸 수 없으니 동작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게 되고, 잠긴 문도 조심스럽게 열게 되고, 몬스터가 많으면 도망쳐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고... 이러다 보면 어느새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벌겋게 눈이 충혈되고, 동트는 걸 봐야 졸리고... 이것이 진짜 로그류인 것이다.

게임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의 식료품점에 들렀다.


쥐새끼들이라고 얕보았다간 끝없이 밀려오는 놈들을 막지 못해 결국 무릎을 꿇어야 한다.

NetHack이나 Angband 패밀리보다 ADOM을 먼저 접해서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도 게임 시스템이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어, 언리얼월드를 접하기까지는 가장 재밌게 즐긴 게임이다. 물론 오늘같이 화창한 날에 어두컴컴한 던전을 돌아다니는 꼴을 주위 사람들이 보면 혀를 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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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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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냥이 2009.10.08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웹 검색하다 우연히 들어왔어요 ㅎㅎ
    ADOM 저도 재밌게 했던 게임인데 반가워서 댓글 남겨요 ㅋㅋ
    너무 어려워서 항상 극초반에 머물렀지만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