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의 유혹

롤플레잉 2006. 4. 5. 13:17
우리 부부에게는 외식 메뉴를 선택함에 있어 한 가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기준이 있다. 바로 1인당 2만 원을 넘지 않는 가격이다.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라도 비싸면 안 된다. 심지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가도 메뉴판을 보고 가격대가 맞지 않으면 주저 않고 일어선다. 게다가 마인트 컨트롤 내지는 포기가 동시에 일어난다.
"꼭 이걸 먹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굳이 이걸..."
"일어서자구."
신혼 때는 둘이서 가끔 신촌의 2500원짜리 선지국밥을 먹으러 다녔다. 둘이서 5천원이면 충분히 배부른데 4만원이 넘어가는 음식은 좀처럼 용납하기 어렵다. 설마 이게 8배씩이나 맛있을까...

몇 년 전에 퓨전 일식집에서 동기들과 부부 또는 친구 동반 망년회를 한 적이 있다. 장소는 내가 잡았는데 자주 점심 먹으러 가던 집이었다. 그쪽으로 잡은 이유는 가게 분위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가격 대비 성능이 좋다고 생각해서였다. 약속 시간에 모인 우리는 예약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이어 메뉴판이 나왔는데 그순간 난 뭔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이상하게 내가 점심 때 늘 먹던 메뉴가 안 보이는 것이다.
'어 이상한데... 그게 어디갔지?'
'헉 이게 뭐야. 0이 하나씩 더 붙었잖아.'
아뿔싸. 난 이제껏 직장인을 위한 특가의 점심 메뉴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내 굳어진 얼굴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챈 사람은 당연히 아내였다. 그리고는 내게 귓속말로 물었다.
"이거 맞어?"
"몰라... 이런 건 나도 처음 봐."
식은 땀이 흘렀다. 우리 둘만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일어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이 망년회 시즌에 예약도 없이 어딜 가서 다시 자리를 마련한단 말인가. 고맙게도 친구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Acceptable..."
"Not bad..."
음식은 맛있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친구들과 기분 좋게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내게 말했다.
"다음엔 이런 데 잡지 마.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해..."
"당연하지... 내가 미쳤남."
아직 딸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아내랑 양수리 방면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오랜만의 나들이라 제대로 쉬었다 오자는 생각이었고, 당일 코스로 다녀오기엔 좀 아쉬워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밤 11시가 넘어 눈에 띄는 여관을 찾았는데,
"5만원입니다."
"예? 얼마요?"
"5만원이요. 주말엔 이 근처 다들 이렇게 해요."
"그래요?"
순간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5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마구 떠오른 것이다. 더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본인의 옷은 전부 1~2만원 짜리만 사는 아내가 이제껏 돈을 아끼지 않을 때는 남편 옷을 살 때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할인점이나 중저가 브랜드를 두고 굳이 비싼 백화점을 누비지는 않는다. 언제나 주장하는 바이지만 가격이 두 배가 되려면 효용도 두 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나도 가끔은 사치하고 싶은 종목이 있는데 바로 컴퓨터이다. 컴퓨터 자체는 어차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다. 돌아서면 더 좋은 성능으로 신제품이 나오니 그걸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한 번 장만할 때 당시 최고 사양으로 뽑아서 몇 년을 우려먹으면 된다. 내가 사치하고 싶은 것은 컴퓨터 본체가 아니라 주변 장치이다. 다년간 컴퓨터를 써 보니 보통은 소홀하게 생각하는 입력장치나 모니터, 스피커, 마우스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특히 모니터와 키보드는 무조건 좋아야 한다. 예전에 필립스 둥근 모니터에 하도 크게 당한지라, 조립업체에서 아무리 감언이설로 꼬셔도 브랜드 없는 건 절대 사절한다. 좀 비싸도 삼성이나 엘지 이상의 모니터가 아니면 안 된다.

며칠 전 딸이 아빠 키보드를 망가뜨렸다. 모니터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니 실은 그 앞에 놓여있던 커피잔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쩔 도리 없었다. 커피가 쏟아진 키보드는 그걸로 끝이었다. 말려도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지난 세기부터 써오던 키보드라 사실 오래 되기도 해서 그렇잖아도 바꿀 참이었는데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겠다. 우선 급한대로 지난 번에 컴퓨터 새로 장만할 때 따라온 5천원짜리 키보드로 갈아놓았는데,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고 10분이 넘어가면 팔이 저려온다.

문제는 내가 예전부터 노려 오던 키보드의 가격인데, 아내의 결재는 물론이거니와 내 상식으로도 저항감이 심한 가격이다. 35만원이면 모니터 빼고 어지간한 컴퓨터 한 대 값인데 그걸 키보드 하나에 때려박다니... 그것보다 좀 싼 것도 있긴 한데 그것도 만만치 않다. 18만원이다. 이번 기회에 미친척하고 하나 사서 10년 정도 쓸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한편으론 35만원짜리라고 어디 딸의 커피 테러에 멀쩡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 고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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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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