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여행은 마치 일본식 RPG와 같다. 그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여행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닥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의 초짜일 뿐만 아니라 귀찮은 거 딱 싫어하는 나로선 여행 같은 것에 괜스레 폼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남들 움직일 때 묻어가고, 남들 쉴때 같이 쉬고, 남들 먹을 때 밥숟갈 하나 더 놓는 거. 이것이 내 삶의 철학 아니던가. 코스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고, 열차편이 있는지 알아보지 않아도 되고, 맛대가리 없는 식당 걸릴까 걱정할 필요 없어서 좋다. 그런 면에서 패키지 여행은 딱 내 스타일이다. 처음 가는 여행은 이렇게 가고, 나중에 혼자 갈 땐 괜찮았던 곳만 찍어 가면 되는 것이다.

내일 답사를 간다. 3박4일의 짦지 않는 기간에다가 돌아볼 곳도 상당히 많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잔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뭐 이 정도는 묻어가는 거니까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설마 나만 놔두고 가진 않을 거 아닌가. 다만 심히 걸리는 것이, 며칠간 외박을 한다는 것인데...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내가 워낙 집(家)적이라, 밖에서 자는 걸 아주 싫어한다. 아무리 늦게 술을 먹거나, 아무리 멀리 여행을 가더라도,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집에 가서 잔다. 집에 꿀단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밖에서 자는 건 영 편하지가 않다.

그럼 내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또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학창시절만 해도 동가식서가숙으로 유명했던 몸이다. 동기들 집 순회방문, 학생회실 철야 근무(?), 심야 만화방 등... 하숙집 아주머니가 날 면회라도 할라치면 며칠을 기다려야 얼굴 한 번 볼까 말까 하던 귀하신 몸이었다. 나중에 자취를 할 땐 그 정도가 더 심해졌는데, 아무래도 집에 들어가 봐야 방에 온기도 없고, 기다려 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굳이 집에 기어들어갈 생각이 나겠는가. 하지만 다년간의 방랑 생활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져 버렸다. 전세를 얻어 제대로 정착하게 된 이후로는 다시는 외박 같은 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외박만 아니면 꽤나 괜찮은 패키지 여행이 기다린다. 이런 다소 강제적인 여행이 아니라면 절대 내 의지로는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없을 거다. 여행기는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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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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