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질투는 나의 힘 中, 기형도
정말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책장에 꽂혀 있던 어느 책이 종이 하나를 떨어뜨렸다. '편집부 89학번 학습 프로그램(2차)' 라는 제목의 종이다. 요즈음처럼 워드 프로세스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글이다. 다음은 문제의 학습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2차 편집부 학습 프로그램의 목표는 칸트의 말과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올바르게 복무하기 위하여는 현실 분석의 위력 있는 무기를 얻도록 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2차 학습 프로그램은 그러한 점을 통해서 성원 개개인의 내적 성장을 기할 수 있도록 한다.

part 1> 철학적 제문제
철학은 세계관으로서,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노는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이미 앞서의 학습에서 인식되어졌으리라 여긴다. 이 2차 학습에서는 그러한 문제인식을 실제 '삶의 변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다.

(참고서적:
『칸트』, F. 코플스톤, 중원문화
『칸트 철학 입문』, W.O. 되에링, 중원문화
『헤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 강의』, 황세연, 중원문화)
(* 도서는 참고서적과 기본서적을 제시할 것이며, 기본서적을 골간으로 하여 참고서적으로 보충할 것: 위에서는 '과학적 세계관'의 모태로서 칸트와 헤겔의 역할과 사상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것)

- 기본서적:『변증법적 유물론』, 아파나셰프, 백두
(참고서적:『세계철학사 II』, 아카데미, 녹두 『철학의 기초이론』, 콘스탄티노프, 두레)

후략
이 학습 프로그램(커리큘럼)의 백미는 역시 참고서적에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당시 편집부 선배의 친척이 중원문화 라는 출판사에 다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기본서적 한 권에 참고서적은 최소 두 권이다. 설마 이 참고서적을 다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리라 기대한 걸까. 아니면 선배들의 의식 수준은 저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으라는 것일까. 위에는 인용되지 않았으나 경제학적 제문제의 기본서적은 부총양삼(富塚良三)의 『경제학원론』이다. 이건 당시 군대의 금서 목록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책이었다. 다른 정치경제학 관련 서적은 어지간하면 금서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여기에 참고서적으로 소개된 책이 아파나셰프의 『위대한 발견』과 마르크스 선생의 『자본』, 루빈의 『마르크스의 가치론』, 뵘바베르크의 『노동가치론 논쟁』 등이다.

참고로 이 커리큘럼은 이제 막 『철학에세이』나 한국 근현대사를 읽고 난 1학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당시 1학년들은 다른 학회나 동아리에선 대체 무얼 공부하는지 궁금하여 서로 커리큘럼을 교환하곤 했는데, 다른 곳은 다들 비슷비슷한데 우리 편집부만 전혀 다른 걸 배우는 것이었다. 다른 학회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칸트나 헤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부 선배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만 커리큘럼이 달라요?"
"이게 제대로 공부하는 거지."
"다른 학회들은 그럼 뭐죠?"
"편집부는 원래 수준이 좀 달라..."
"???"
정말 그런 것인지 수기 아저씨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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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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