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득과 실

롤플레잉 2006. 3. 20. 01:58
최근에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청년이 군대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를 내게 물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군대를 다녀오는 게 좋은가요, 안 가는 게 좋은가요?"
오늘 내일 하는 사람도 아닌 내게 인생 전체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그 청년보다는 조금 더 살았으니 한 마디 해도 되겠다 싶었다.
"군대가 유익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안 가려고 발버둥을 치겠어요?"
"몸은 좀 힘들더라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얻는 게 많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왜..."
"얻는 게 많다는 그 사람 군대 말뚝 박던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한 번쯤은 경험해볼 만한 거라던데요..."
"그 얘긴 달리 말하면 두 번 다시 하기 싫은 경험이라는 거죠."
"그렇게 되나요..."
이쯤 되면 마치 내가 군생활 엄청 험하게 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미리 말해두지만, 난 객관적으로 군생활 아주 편하게 한 축에 든다. 원래는 특공대로 갈 병력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힘 쓰는 일은 하지 않을 팔자였는지 컴퓨터 특기를 인정 받아 전산병으로 복무했다. 혹시 전산병 하면 밤새도록 워드프로세서 두들기는 행정병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행정병과 전산병은 다르다. 전산병은 독립된 전산실 건물에서 근무하며, 군수자원관리나 일일병력보고, 기타 워게임(가상 전투) 같은 말 그대로 전산 관련 업무를 한다. 말하자면 팔자 좋다는 거다. 일반 행정병 중에는 장교 잘 못 만나 마르고 닳도록 워드만 치다가 급기야 입이 돌아가서 후송되어 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유닉스 장비에서 COBOL이나 SQL 서버 등을 주로 활용하는 일이었다. 업무 환경도 좋아서 여름엔 에어컨, 겨울엔 보일러 난방이 기본이었으며, 남는 시간에는 자유롭게 책도 읽을 수 있었다. 남들은 돈 주고 배운다는 유닉스를 공짜로 익혔으니 나름대로는 군생활 알차게 한 편이다. 물론 나도 사격 훈련이나 혹한기 훈련, 유격 훈련 같은 건 다 받았으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이 시점에서 군대에 대한 오해 몇 가지를 풀고 가자. 군대 가지 말라는 사람들 중에는 군에서 겪는 시련 같은 것은 사회 생활 하면서도 충분히 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군생활 자체가 더욱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군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곳이 군대라서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군대 만큼 혹독하고 극한 상황에 처하는 경험을 얼마나 하겠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부대 내에서는 머리 박기 하면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휴가 나와서 집에서 한 번 똑같이 해 보면 안다. 유격 훈련하면서 지겹게 하는 선착순, 집에서 해 봐라. 그만큼 할 수 있는지...

인생의 황금기에, 한창 공부하고 생산적인 일을 할 시기에 군대 같은 곳에 가서 2년을 허비하고 오는 것이 정말 아깝다는 사람도 많다. 이런 논리도 자신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만이다. 방학 때 책 한 권 읽지 않고, 휴일에 공부 한 자도 안 하는 사람들이 꼭 이런 얘기한다. 남들 다 허비하는 2년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면 뭐 큰 일이라도 할 것 같지만, 내가 알기로 군대 안 간 사람 중에서 그동안 뭔가 이루어낸 사람 하나도 없다.

소중한 사람들과 2년 동안 떨어져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 군대 가서 첫 휴가 나오면 친구들 모두 반긴다. 하지만 휴가나 외박이 잦아질수록 친구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휴가가 시험기간에라도 걸리면 차라리 부대에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롭다. 2년은 정말 금방 간다. 물론 부대에 갇혀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밖에 있는 친구들은 휴가 자주 나오는 군인들 정말 싫어한다. "너 또 나왔냐?" 이런 소리 의외로 자주 듣는다.

아니 그렇다면 군생활 동안 얻는 건 있고 잃는 건 별로 없으니 군대 다녀오는 게 좋다는 얘기 아닌가? 끝까지 들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안 가는 게 훨씬 좋다. 왜냐하면 군생활 동안 아주 필요 없는, 아니 배워서는 안 될 것을 하나 배워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강자에 대한 굴종'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해지는 것. 멀쩡한 청년들이 군대에서 이런 걸 배우기 때문에 내가 군대 안 갈 수 있다면 절대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등병때엔 누구나 서럽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부당한 이유로 신체의 구속을 당한다. 게다가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이 올라가면 스스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으로 자신에게 권위가 주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를 계속적으로 보장 받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상급자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흘러가고 언젠가는 내가 저 정점에 우뚝 설 수 있는 날도 오는 것이다. 이는 정말 민주사회에서는 불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독이 되는 경험이다. 아주 짧긴 하지만 노예제나 봉건제의 맛을 보고, 그것이 군림하는 자나 그것에 기생하는 자에게 얼마나 달콤한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긴 군대야말로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계급사회이니...

그렇다고 편법을 써서라도 군대를 다녀오지 말라는 얘긴 아니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안 갈 수만 있다면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럼 이 나라는 누가 지키냐고? 누군가는 조국의 영토를 수호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난 애국자 아니다. 딴 데 가서 알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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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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