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돌아보면 어느 한 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으랴만, 올해는 유난히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많다. 몇 년 동안 공부한 것도 허사가 되질 않나, 경제적으로도 압박감을 느끼질 않나,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질 않나...

오늘 갑작스런 사고로 컴퓨터를 날렸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랴. 그래서 낯빛이 변한 날 보고도 아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저 인간 가끔 저러지... 오늘 좀 예민하겠군...'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다른 날보다 내 절망의 강도가 높다는 걸 알아차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다.

"컴퓨터가 망가졌어."
"그래? 아예 망가진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어느 정도로 망가졌는데?"
"... 완전히, 싸그리, 모조리, 깡그리, 전부다 ..."
"어쩌다가?"
"몰라. 갑자기 그래."
"OS를 다시 깔면 안 되나?"
"그러면 되겠지만 데이터는 못 살려."
"그 정도야?"
"파티션이 아예 없어졌어."

그렇다. 파티션이 없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다 생기나. 가끔씩 컴퓨터가 망가질 때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용케도 하드 디스크의 데이터는 살렸다. 그래서 OS를 재설치한 후에 몇 가지 번거로운 작업들을 거치면, 수고스럽고 피곤하다는 것만 감내하면 그래도 세상이 그렇게 어두워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파티션이 아예 날아가 버려서 다른 컴퓨터에 붙여도 파일시스템이 아예 인식조차 되지 않게 되었다.

여기까지 말해도 아내는 비록 고개는 끄덕이지만 어떤 사태인지 체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일하던 거 다 날린 거야?"
"그런 건 괜찮아."
"그럼 뭐가 문제야? 아 그렇구나. 공인인증서 다시 받아야 되겠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딸들 찍어놓은 사진이 다 날아갔어."
"그럼 문제가 크구나."

아내의 얼굴도 역시 어두워졌다. 물론 중요한 자료들도 많지만 그거야 다시 고생하면 될 일이다. 이런 일 몇 번 겪다 보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자료들 그거 나중에는 없이도 사는 거 보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그렇지만 아이들 사진은 어쩔 수가 없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은가.

"다른 곳에 사진 복사해 놓는다고 해 놓고선 안 했구나."
"응."
"네이버에는 얼마나 올려 뒀어?"
"글쎄. 확인해 봐야지."
"큰딸 사진도 다 날아갔나?"
"그 정도는 아닐 걸..."

확인해 보니 다행히 올해 7월 초까지 찍은 사진은 포털에 백업해 놓았다. 다만 그 이후로 찍은 사진들은 고스란히 날려 먹은 거다. 게으름은 역시 범죄다. 미리 백업만 해 놓았다면 이런 일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왜 있겠나.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는 인간은 성인군자 아니면 또라이들이라는 거 아니겠나. 나같은 보통 사람들 소 잃기 전에는 절대로 외양간 안 고치잖아.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남편이 너무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니 위로의 말을 해 주려는 것도 있지만, 아내는 원래도 나보다는 포기가 빠르다.

"어쩌겠어. 날아간 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7월 초까진 살렸네. 11월엔 또 바빠져서 사진 찍어놓은 것도 없을테고. 그 사이 몇 달치 날렸네."
"..."
"앞으로 딸들 사진 더 많이 찍어 줘. 그리고 이젠 백업도 좀 해놓고."
"응."
"그리고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좀 쉬어."
"..."

그래도 복구가 안 되는 사고는 너무나 힘들다. 아내는 좀 쉬라고 했지만, 시커면 모니터를 바라보는 건 더 괴로울 것 같다. 그래서 뭐라도 설치하자는 마음으로 찾았더니 작년 가을에 나온 리눅스 CD가 한 장 있다. 이거라도 우선 깔자. 제기랄... 아우 힘들어. 올해 운수가 왜 이러니 정말... ㅠ

하긴 그렇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힘들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나중에 돌아보면 그땐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말한다. 훗날 올해를 돌아볼 때에도 아마 그렇게 말할 거다. "그땐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지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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