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보행

패밀리 2006. 1. 29. 14:32
나의 유아기 시절에 대한 기억력은 남다른 데가 있는 것 같다. 길지 않은 인생이나마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만큼 유아기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난 어머니의 젖을 먹던 시절을 기억한다. 어머니의 젖의 감촉도 기억한다. 그 시절 난 오른쪽으로 눕는 자세를 훨씬 더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어머니의 손길, 누워서 양손에 분유병을 쥐고 바라본 천장의 벽지 무늬...
내가 생각해도 참 별일이다.

이제 내가 딸을 키우는 입장이 되니, 내가 요만할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서 참 재미있다. 지금 생각하기로도 난 분명히 키우기 쉬운 아기는 절대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안 자고 울어댔으며, 목욕하기 싫어서 난리를 치고, 도망도 다니고...
자식 키워 보면 부모님 마음을 안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만큼은 아닐 거다. 현재 내 딸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나의 어릴 때 모습과 직접 비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나와 놓고 보면 정말이지 우리 어머니는 대단하시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것은 내 기억력이 미완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잃어버린 기억이라는 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난 비교적 또렷하게 유아기 시절의 내 일련의 행동을 기억하긴 해도, 정작 중요한 그 행동의 동기, 즉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거다.
행동의 동기가 왜 중요한가. 바로 현재 딸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분명 그 때 나도 특정한 상황에서 엄청 많이 울었고, 지금의 딸도 비슷한 상황에서 울어댄다. 근데 화가 나는 것은 왜 이놈이 우는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점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시절 이맘때 그랬듯이, 딸도 현재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몇 걸음 못 가서 바닥에 나동그라지기도 하고, 탁자 모서리에 찧어서 자지러지게 울기도 한다. 분명히 지금 상태로선 기어가는 것이 훨씬 정확하고 빠르다. 기는 게 별로 맘에 안 들면 걷는 것보다는 안전한, 무릎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기를 쓰고 험한 길을 가려는 것일까. 신생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냥 누워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을텐데, 왜 굳이 뒤집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는 것일까. 뒤집는다고 해서 뭐 먹을 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껏 뒤집어놓고는 숨쉬기조차 어려워하지 않는가 말이다.

인간의 특징 중에 하나가 직립보행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렇지만 딸을 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직립보행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혀 아쉬울 것 없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그 본능과 같은 의지가 아니었다면 인간이 두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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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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