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뜨는 소

롤플레잉 2006. 2. 26. 22:17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역시 시간은 내 편이 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치과 가기가 꺼려진다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버틴다 해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닌 것이다. 늘 그렇듯이 이빨을 너무 늦은 상태로까지 몰고 가서 결국엔 치통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서야 동네 치과 문을 두드렸다.

치과를 꺼리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지만 실은 아주 억울하고 원초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 치신경의 문제인데, 난 원래 이빨 마취가 잘 안 되는 타입인 것이다. 더이상 어떻게 절망적일 수가 있을까.

간밤의 치통으로 벌써 기운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지만 집을 나서면서 벌써 치과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 들른 의원에서 예약 손님 때문에 오늘은 더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면서 어이 없게도 안도의 한숨을 쉬기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금 엄습하는 강한 통증만 아니었던들 두 번째 의원으로 발길을 향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취 들어갑니다. 잠깐 따끔할 거예요."
"예..."
하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혀끝으로 이빨을 살짝 건드려 보니 감각이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치료 시작합니다. 아프면 왼손을 살짝 드세요."
"..."
윙 하는 드릴 소리가 나자마자 왼손이 번쩍하고 올라갔다. 동시에 신음소리와 함께 온몸이 뜰썩였다.
"어... 아프세요?"
"음음..."
"마취가 잘 안 되었나 보네요. 다시 합시다."
"..."
다시 마취 주사를 놓은 의사 선생은 나를 치료대 위에 버려 두고 그동안 다른 환자를 받았다. 나는 덩그러니 내버려진 채 누워서 천장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 다시 시작합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음음..."
이번에도 역시 신음소리와 함께 치료대가 요동쳤다. 마취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온몸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다. 허영만의 비트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이민'의 별명이 순간 생각났다. '누워서 뜨는 소'가 이런 건가... 로렌스 올리비에가 마취도 않고 더스틴 호프만을 고문하던 마라톤맨도 떠올랐다. 나만큼 그 영화에 감정이입된 사람도 없으리라...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선생님, 어쩌죠?"
"휴~ 큰일이네... 할 수 없군. 이빨 안으로 주사 바늘을 찔러 넣어 보자..."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결국은 여섯 번의 마취 시도 끝에 의사 선생은 포기해 버렸다. 환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지쳤다.
"할 수 없네요. 마취가 안 됩니다. 그냥 좀 참으세요."
"!!..."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때의 아픔이 떠올라 고통스럽다. 사실 순수하게 치료만 한 시간은 5분도 채 안 되었으나 의사 선생은 그동안 마취가 되기를 기다리는 나와 다른 환자들 사이를 바삐 오가는 바람에 이빨 하나 치료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주말을 진통제로 버티고 내일 또 전쟁을 치르러 가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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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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