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나야 그렇다 쳐도 주위에 보면 평소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 잘 챙길 것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치과 가는 것만큼은 꺼려하여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치통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서도 아주 날카롭고 소름 끼치는, 그러므로 어지간히 무던한 사람이라도 참기 힘든 통증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참기 힘들어 밤잠을 설치는 단계에 와서야 마지 못해 치과 문을 두드리게 된다. 대체 왜 그럴까.

내 경우에 치과가 두려운 이유는 이빨이 아파서가 아니다. 아픈 이빨을 낫게 해 주는 곳인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렇다면 뒤로 젖혀지는 의자에 누워 윙 하는 소릴 내면서 돌아가는 드릴 소리가 겁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한두살 먹은 어린애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정작 무서운 것은 '과연 의사 선생이 환자의 이빨을 자기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어 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이다. 아무리 아픈 이라지만 그래도 내 몸의 일부이다. 그런데 의자에 누워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환자의 귀에 의사 선생의 "빼야겠네요..." 라는 무심한 한마디가 꽂힌다. 이런 말을 들으면 과연 자기 이빨이라도 그런 생각을 할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빨은 한 번 뽑거나 갈아내면 다시 붙일 수가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치과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군입대를 앞두고 고향 부산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친구의 형이 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동네에 개업을 했다. 달리 할 일도 없던 차라 가끔 그 치과에서 일도 도와주고 술도 얻어마시곤 했다. 의사 한 명과 간호사 한 명밖에 없는 작은 의원이라 나도 형 옆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날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왼쪽 아래 어금니가 심하게 상해서 신경 치료에 들어갔다. 무사히 치료를 마치는가 싶었는데 그만 형의 손이 삐끗하여 어금니 밑의 동맥을 잘라버린 것이다. 거짓말처럼 피가 퐁퐁 솟아올랐다. 내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났을 때 형도 당황한 듯 움찔했지만 이내 날 돌아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러더니 잽싸게 실로 상처를 봉합했다. 동맥이라 쉽지 않았지만 거의 재봉틀 바느질 수준으로 몇 겹을 꿰매어 나가니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던 피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집에 가시면 마취가 깨면서 많이 아프실 거예요."
"..."
"어금니가 엄청 심하게 상해서 그래요. 많이 아프시면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 드세요."
"..."
아무 것도 모르는 아주머니는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남긴 채 돌아갔다. 아마 다른 의원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그날의 의료사고는 묻혔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상병 계급으로 겨울을 날 때였다. 찬물을 마실 때 송곳니가 조금씩 시려 오길래 군병원을 찾았다. 군의관은 "충치구만" 이라는 한마디 외엔 별말도 없이 내 이빨을 드릴로 한참을 갈더니 다 되었다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솜을 꽉 물고 있다가 병원 문을 나서면서 뱉었는데,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불어온 포천의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이었을까. 맞다. 바람 때문이다. 그런데 평소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뭔가 허전한 것 같은데... 아니 이럴수가... 이를 꽉 다물었는데도 입 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다시 병원 문으로 뛰어들어가서 복도에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노래 가사와도 같이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아 글쎄 내 송곳니가 뿌리쪽 약간만 남고 삼분의 이 가량 없어진 것이다. 군의관 이 얼빠진 놈이 기껏 했다는 치료가 아픈 이빨을 아예 갈아내 버린 것이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장교다. 그 다음 주말에 외출증을 끊어 시내 치과를 갔더니 의사 선생 말이,
"아니 대체 누가 이빨을 이렇게 망가뜨렸어요?"
"..."
"안되겠네요. 뽑아야겠는걸..."
이빨 뽑으며 속으로 많이 울었다.

환자의 이빨을 자기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는 솜씨 좋은 치과 어디 없나. 혹시라도 알고 계시는 분은 추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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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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