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고학의 추억

롤플레잉 2006. 2. 22. 15:54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彼岸)이 사라진 뒤에, 차안(此岸)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이다. 인간의 자기 소외의 신성한 형태가 폭로된 뒤에, 그 신성하지 않은 형태들 속의 자기 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역사에 봉사하는 철학의 임무이다. 이리하여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된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中, 칼 마르크스
학창시절엔 약속을 잡게 되면 기다리기 좋은 단골 만화방을 주로 선호했으나, 사회인이 되어 버린 지금은 아무래도 약속 장소가 학교 쪽이 아니다 보니 시내의 대형 서점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 친구들과 강남에서 모였을 때에도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며 기다렸다. 인문 섹션을 둘러보는데 특가 세일 코너가 눈에 띄길래 뭔가 하고 다가가서 봤더니 [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 시리즈를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들어오는 한 권의 책은 바로 마크르스의 '공산당선언'이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쓴웃음도 나온다. 불과 10년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도 변해 공산주의는 할인 판매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약속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있는지라 본문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아주 재미있는 발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책 내용이 의외로 굉장히 쉽다는 것이다.
'이상하네... 예전에도 이렇게 쉬웠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당시엔 꽤 어렵다고 생각했던 책이 지금 이렇게 이해가기 쉬운 언어로 되어있는 것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처음엔 번역이 달라졌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낯익은 문구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동안 내가 사회과학만 들입다 공부해서 알게 모르게 내공이 쌓인 것인가. 물론 절대 그렇지 않다.

집에 와서 책장에 꽂혀 먼지만 마시고 있던 마크르스 엥겔스 저작들을 꺼내 들었다. 여기저기 몇 장을 넘기면서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참나... 이 말이 대체 뭐가 중요하길래 밑줄을 그어 놓았을까.'
'아니 여긴 왜 중요 표시가 되어 있나?'
'허허... 이런 메모를 해 놓았단 말인가...'
책은 밑줄과 메모로 꽉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꽤 열심이었던 적이 있었다. '미시경제학' 책을 이렇게 열심히 봤더라면 지금 뭔가 되더라도 되었을지 모른다.

근데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게다가 그때는 한줄 한줄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치 문예비평지처럼 술술 넘어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역시나 대학 2,3학년에게 정치 팸플릿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의 사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은 책 속에만 머무는 진리.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얘기가 나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원전(原典)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수기 아저씨의 말마따나 '훈고학(訓詁學)'적인 냄새가 물씬 나지 않은가. 아무도 스스로 권위를 세울 수 없어 문장의 권위를 빌어오고 싶었던 것이다. 공자曰 맹자曰이 '마르크스 가라사대' '레닌이 말하기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니 사실은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 잘 모른다. 통째로 암기할 뿐... 그 중에서 필요할 때마다 그에 적합한 문구를 그때그때 따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그냥 '창작과 비평' 또는 '문학과 사회'처럼 읽으면 되었던 것을 마치 수능(당시엔 학력고사였다) 공부하듯이, 전혀 비본질적인 부분에 밑줄까지 쳐 가면서 매달렸던 것이다.

고전을 읽으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로부터 파생된 해설서나 소위 사회과학 서적이라는 것 자체가 훈고학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보석을 보석함 속에 넣는 순간 더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전 또한 진리의 영역 속에 박제하는 순간 단순히 낡은 텍스트로 전락할 것이다.

고전을 읽자. 지하철에서 읽는 '씨네21'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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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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