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과 자장면

프렌즈 2006. 2. 20. 17:11
요즘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예전엔 졸업식에 자장면을 먹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중국집에서 다른 메뉴도 아니고 딱 자장면 한 그릇 해치웠다. 6학년 때엔 하루 걸러 한 번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2교시 마치고 먹어치운 후, 점심시간에 학교 앞 중국집에서 또 자장면을 먹었을 정도로 흔하디 흔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떤 날엔 꼭 먹어야 하는 음식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식 말고도 자장면이 빠지지 않는 날이 있는데 바로 이사하는 날, 휴가 나오는 날 등이다. 일병 첫 휴가 나왔을 때 함께 나온 동기들과 부대 앞에서 먹은 자장면 곱배기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외식 거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요즘도 졸업식과 자장면은 이렇게 가슴 찡한 얘깃거리를 만들어준다.

이 글을 보니 내 주위에도 이 둘에 얽힌 사연이 하나 있어 소개한다.

대학 동기 R은 학창시절부터 인물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여 항상 여자친구가 있었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처럼 생겼다고들 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자기 주먹을 입에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입이 크긴 하지만, 심지어 초코파이도 세워서 들락날락할 수 있지만, 그래도 꽤 잘생긴 프랑켄슈타인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날은 R의 여자친구가 졸업하는 날이었다. 군대 다녀온 후 복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R은 당연하게도 꽃돌이가 되었고, 드디어 공식적으로 여자친구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교정을 옮겨다니며 졸업사진을 찍어주고 짐도 들어 주기를 두어 시간, 점심 시간이 되었을 때, 멀쩡하게 생긴 딸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꽤나 좋아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꽃돌이에게 외식 취향을 물었다.
"자넨 뭐가 좋은가?"
"당연히 졸업식엔 중국집이죠!"
"중국집?"
"예!"
군대식으로 절도 있게 대답한 R과, 중국집도 좋다고 생각한 여자친구의 가족들은 함께 근사한 중국집으로 이동했다. 특실에 자리 잡은 가족들은 메뉴판을 보며 어떤 코스가 좋겠다고 한 마디씩 했다. 그때 다시 꽃돌이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긴 아버지...
"어떤 코스가 좋겠는가?"
"아닙니다. 전 자장면이 좋습니다."
R은 다 좋은데 원칙에 너무 강하다.
"아니 자장면은 어떤 코스라도 나중에 다 나와."
"전 괜찮습니다. 자장면 시켜 주세요."
"내가 산다니깐. 걱정 말고 시켜 이 사람아..."
"전 자장면이 좋습니다. 졸업식엔 뭐니뭐니해도 자장면이죠..."
화기애애하던 그날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졌고, 결국 얼마 못 가서 그 둘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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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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