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오해들

롤플레잉 2006. 2. 17. 17:00
다른 사람에 비해 암기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억력 일반은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다. 더우기 유년 시절의 기억은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나를 따라올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기억력에 부작용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느 순간 잘못된 정보가 내 머리 속에 입력되어 검증 절차 없이 오랜 기간동안 다른 정보나 내 가치 판단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아주 예전에 어떤 계기로 인해 생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사실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최근에야 오해를 풀게 된 것들이 몇몇 있다.

1. 이명박
모두들 알다시피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최수종이 나왔던 '태조 왕건' 외에는 대부분의 드라마를 띄엄띄엄 보아 왔다. 그런데 아주 예전에 '야망의 세월'인가 하는 드라마에서 유인촌이 이명박 역으로 나왔을 때 이 드라마를 말 그대로 띄엄띄엄 지나가다 보게 되었다. 이 드라마에서 정말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이명박이 정주영의 사위가 되는, 아니 최소한 정주영의 딸과 야릇한 눈길이 오가는 사이로 드라마가 흘러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아주아주 황당하게도 이명박이 정주영의 사위라는 거다. 난 얼마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으며 이명박과 정씨 일가와 때로 의견이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속으로 '아니... 저래가지고서 명절에 어떻게 얼굴을 보려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저래도 결국은 한통속이지 하고 말았었다.
이명박과 정주영의 관계는 확인 한 번만 해 보면 금방 아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알았고 그래서 사실 확인 자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코미디가 없다.

2. 김용옥
내가 김용옥을 싫어하는 이유는 우선 첫째 말이 많아서이지만, 사실 할 말이 많아서 말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선 그다지 딴죽을 걸기가 쉽지 않다. 이건 그냥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 외에도 그동안 김용옥을 마뜩찮게 생각해온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전두환 자식들 과외' 사건이다.
혹시 이런 사건을 아는 분 계신가.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이제껏 믿고 살아왔다. 그 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김용옥에 대한 기억은 워낙 머리 속에 뒤죽박죽 엉망으로 얽혀 있기 때문인데, 내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보면 이러하다.
1986년 김용옥이 '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했다.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잡지에 김용옥이 포함된 한 무리의 현직 교수들이 전두환네 자식들의 과외 공부를 시켜주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물론 사실 관계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잡지 또는 기사가 실재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여하튼 이 두가지가 묘하게 뒤섞여서 난 이제껏 김용옥의 양심선언의 내용 중에 전두환 자식들 공부시켜 준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권력자 자식들 뒷구멍이나 닦아주던 놈이 무슨 철학 운운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근에 문득 그 생각이 다시 들어 김용옥 관련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김용옥과 전두환 간의 커넥션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명박과 달리 김용옥은 내가 그간 오해를 해 온 건지 아닌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확신하던 내용에 대한 물적 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김용옥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은 혹시 그 때 정황들을 잘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내게 뭐라도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가지고 계신 분은 연락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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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온 것들이 최근 들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간의 오해가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로부터 파생된 이차 정보 또는 그 후의 사실을 대할 때의 나의 태도가 분명 왜곡되었을테니 말이다.
물론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고, 평생 동안 잘못된 사실을 진리라 믿고 살다가 죽는 사람도 많겠지만, 왠지 알고 나면 그간의 세월이 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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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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