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많은 영화를 본다. 하지만 이제껏 보아 온 영화를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선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있을테고, 베스트 목록에 들어갈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 것도 있으리라. 영화 한 편을 놓고 본다면 1시간 30분짜리 영화 전체를 기억하는 미친 인간은 아마 없다고 본다. 그중에서 관객에게 호소하는 포인트, 즉 우리가 이른바 명장면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명장면이라는 것은 영화사에서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평론가들이 찍어주는 것도 아니고, 관객 스스로 제각기 자신에게 와닿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을 말한다.
인생을 70년짜리 영화 한 편이라 했을 때 이런 명장면이 없겠는가. 게다가 픽션이 아닌 다큐멘터리가 주는 감동은 7000원짜리 영화 한 편에서 받는 그것과 비교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소자는 컴퓨터의 저장장치와는 달라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을 지워주는 편리함과 함께, 간직하고 싶은 좋은 기억까지 함께 없애는, 시키지 않은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놈이다. 그래서 추억이란 반복 학습과 같이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인생의 명장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당시 내 짝이었던 L은 우리반 반장이었다. 어떻게 해서 둘이 짝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확실하진 않다. 다만 키 순서로 짝을 정할 때 L이 다른 애들과 순서를 바꿔서 나랑 짝이 된 게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당시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들었던 나랑 짝이 되면 뭐 먹을 거라도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둘은 짝이 되었고 그 사실은 어느 정도는 내게 상당한 힘이 되어 주었다. 반장이라는 완장이 가지고 있는 힘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에서도 당시 L은 우리반에서 적수가 없었다. 한번은 내게 태권도를 배웠다고 말한 것 같다. L의 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애들이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는 충분했다. L은 남이 자기 밥에 손대는 일은 절대로 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자기 밥이라니. 그렇다. L이랑 짝이 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편리함과 함께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것은 L의 괴롭힘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L은 왜곡된 방식, 즉 못살게 구는 방식으로 자기 애정을 표현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을 괴롭히는 것과 같은 식이다. 게다가 그의 괴롭힘은 쉬는 시간을 넘어서 수업시간으로 이어졌는데, 이것만큼은 내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현재 나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겠지만 당시만 해도 수업시간에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고 딴 짓을 한다는 것은 내게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연히 나는 L의 장난에 항의했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주먹이었다.
아~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땐 정말 아침에 학교 가기가 싫었다.

불의에 항거하다
말이 통하는 상황, 즉 이성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에 놓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L의 괴롭힘에 대해 처음엔 전후 관계를 따져서 바로잡아 보려고 했던 나는 차츰 물리적 폭력 앞에선 이런 것들이 다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다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러나 현실은 '말죽거리 잔혹사'가 아니며 나 또한 권상우가 아니었다. 힘을 통한 해결 방식은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듯이 내 방식이 될 수 없었다. 난 아무리 운동을 해도 배에 王자가 새겨지지도 않았고,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런 방식 자체가 나를 힘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무작정 당할 수만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암울한 상황이지만 이대로 참고 있는다는 것은 뭔가 억울했다. TV에서도 나쁜 놈들을 응징하지 않던가. 그런데 현실은 뭐 이런가...
그러던 어느날 우연하게 사촌형으로부터 힘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실패할 확률도 매우 높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이대로 당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다. 난 혼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을 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날도 L은 수업시간에 연필로 나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심지어 선생님께서 장난치지 말라고 지적을 하셨는데도 소용 없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자 나는 L에게 대들었다. 그만 좀 하라고. 싫다는 걸 왜 자꾸 하냐고... 당연히 L은 힘으로 나를 제압하려고 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오늘을 위해 연습한 시간이 대체 얼마인가. 유도의 빗당겨치기로 순식간에 L을 눕힌 나는, L이 어리둥절한 사이 바로 그 다음 동작인 조르기로 들어갔다. 여기서 오늘의 거사를 위해 익힌 필살기가 첨가되었는데 바로 점혈수법이었다. 온몸으로 L의 상체를 제압하면서 동시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L의 예풍혈(입을 벌리면 귀밥 밑에 생기는 옴폭한 곳, 아래턱뼈 끝의 윗부분)을 있는 힘껏 눌러갔다. 교실은 L의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악~! 이거 안 놔?"
"웃기지마. 네가 잘못했잖아.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해."
"너 죽을래? 빨리 이거 안 놔?"
"이거 놓으면 날 또 때릴 거지? 네가 항복해."
"미쳤냐 이 새끼야. 빨리 놔 이거. 죽여버린다."
"절대 못 놔. 빨리 항복해."
"아야! 이 새끼 정말..."
둘은 땀이 비오듯 흘렀다. 워낙 힘이 좋은 L이었으나 나는 그야말로 죽기 살기였고, 예풍혈을 공략한 나의 필살기는 의외로 효과 만점이어서 L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놀라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도 감히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교실은 L의 짐승같이 으르렁대는 소리만 흘렀고 나는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만 상대를 풀어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쉬는 시간 10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작은 승리
그렇게 쉬는 시간이 흘러 다음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지만 둘은 대치 상태를 풀 수가 없었다. 나도 힘이 빠졌지만 L도 조르기를 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지라 역시나 기진맥진했다. 드디서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교실은 책상이 엎어지고 난리가 나 있었다.
"이놈들! 무슨 일이야. 교실에서 쌈질이라니. 빨리 일어나지 못해?"
그러나 둘은 꼼짝도 않고 있다. 하나는 일어날 생각이 없고 하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 다 빨리 일어나!"
"헉헉... 선생님, L이 아직 항복 안 했어요."
"뭐 항복?"
"예... 항복하기 전엔 일어날 수 없어요."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아직도 존경하는 이유는 단순히 1년 내내 숙제를 거의 내지 않으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잠시 선생님은 생각하시더니,
"야 L... 네가 잘못한 거 맞냐?"
"헉헉..."
"어이, 어떻게 된 거냐고. 둘이 무슨 사연인지 알아야 할 거 아냐."
"..."
"L, 네가 잘못한 거 맞어?"
"예..."
"그럼 잘못했다고 인정해라."
"예..."
L의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항복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있다.
"항복이냐?"
"응, 항복이다."
그제서야 나도 맥이 탁 풀렸다.
그렇다. 난 승리한 것이다.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내 인생에 있어 불의에 항거한 최초의 승리였다.

남은 후회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일어나기도 힘들었지만 어쨌든 둘은 선생님 앞에 섰다.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왜 싸웠어?"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어떻게 잘못했는데?"
"선생님, L이 수업시간에 자꾸 저를 괴롭혀서요."
"정말이냐?"
"예..."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짝을 바꾸어 줄까?"
"아뇨, 선생님..."
"예. 바꿔 주세요!"
소위 피해자의 입에서 이런 얘기까지 나온 이상 선생님으로서도 수습할 수 있는 선을 넘어가 버렸다. 선생님으로선 당사자 둘의 깔끔한 화해를 원하셨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당시 나로선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L의 보복이 두려워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 다른 짝을 찾아 떠났다.

걱정과는 달리 L의 보복은 없었고, 그 이후로 다시는 나를 못살게 굴지 않았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이상 두 번 다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점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 그에 비해 두려움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점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다.

L은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니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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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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