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력과 젊음

롤플레잉 2006. 2. 13. 17:03
어제 Cable TV에서 '택견 명인전' 이라는 대회를 중계해 주었다. 무협지 팬인 내가 그냥 지나갈 리 없다. 최소한 대회용으로는 얌전하게 다듬어진 스포츠인 태권도와 달리, 택견은 마치 K1의 그것과 같이 거세되지 않은 무술로서의 숨소리가 살아있다.

대회는 16강이었는데 그 중 한 시합에는 띠동갑 간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20대 중반의 날렵한 청색 도복과 30대 후반의 적색 도복 간의 대결이었다. 해설자의 소개로는 날렵하고 힘과 스피드가 장점인 젊은 고수와 노련미 넘치는 장년 고수의 대결이란다. 경기가 시작되자 처음엔 마치 유도와 같은 탐색전이 벌어진다 싶더니 한순간에 손과 발이 상대방을 향해 날아들어갔다. 둘 다 고수인지라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느 한 순간 젊은 고수가 장년 고수에게 바람같이 다가서더니 오른발을 번쩍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찍어내려갔다. 그와 함께 반사적으로 장년의 고수도 반격을 위해 함께 돌진해 들어갔고, 자신의 얼굴에 상대방의 발이 닿는 그 순간 되치기로 젊은 고수를 넘어뜨려 버렸다. 심판의 손은 적색 도복의 장년 고수를 향해 번쩍 올라갔다. 장년의 고수가 상대방을 넘어뜨렸으므로 1점과 함께 첫 판을 따낸 것이다. (택견은 점수가 나면 바로 한 판이 끝나며, 총 세 판으로 승부를 가른다.) 그런데 이 젊은 고수의 발길질이 예사롭지가 않았나 보다. 적색 도복은 계속해서 코에서 피를 흘렸고,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경기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해설자 말로는 발이 코를 스쳤는데 그 정도로도 코뼈가 부러지는 건 예사란다. 아무래도 이 경우도 그런 것 같았다. 결국 경기는 둘째 판에서 한 점을 더 따냈지만 더이상의(8강 이후의) 경기를 진행하기 불가능했던 장년 고수의 기권으로 끝나 버렸다.

무협지에선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고수 대접을 받는다. 단순히 예의범절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하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허연 수염을 휘날리는 고수가 이제 막 강호에 나온 젊은 초짜 고수 여럿을 가지고 노는 장면은 무협지에선 너무도 당연한 얘깃거리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왜 태권도는 올림픽에 나이 든 고수들을 내 보내지 않는가. 눈만 뜨면 내공 운운하는 우슈는 또 어떠한가. 올림픽의 무술 종목 중 맏형이라 할 수 있는 유도도 마찬가지 아닌가.

역시 무협지는 판타지일 뿐인가 보다. 힘이 빠져 뒷방 신세로 전락해가는 고령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머리를 짜낸 것이 무협지의 공력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나이를 먹을수록 공력이 올라간다고, 그래서 더욱 강해진다고 해도, 공력과 젊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젊음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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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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