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술내기

프렌즈 2006. 2. 11. 16:36
지난해 말 송년회도 못했던 동기들이 어제 강남역에서 모였다. 그래 봐야 남자 넷이서 모일 작정이었고, 그나마 한 놈은 퇴근시간 무렵 직장 상사에게 잡혔는지 결국 나오지 못했다. 광 파는 인간은 못 오더라도 세 명이면 그래도 밥먹고 술 한 잔 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다.

영광굴비로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사이비 와인바에 자리를 잡았다. 가격이 비싼 것 말고는 마주앙이랑 무슨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는 와인에, 저녁을 먹어서 그랬는지 왠지 손이 잘 안 가는 치즈를 안주로 시켜놓고, 직장 상사에 대한 성토로 시작해서 수능 얘기로, 학교 다닐 때 배운 과목 중에서 지금도 유익하다 싶은 것들, 혹은 그 때 공부 좀 해 놓지 못한 것이 아쉬운 과목들, 송도 신 캠퍼스 얘기 등 주제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결국은 주제가 온국민의 단골 메뉴 스포츠로 방향을 틀었는데...

처음엔 화기애애했다고 할 수 있다. 정재근, 문경은, 이상민, 전희철 등이 거론되었던 농구 얘기나, 박노준이 라이벌로 의식했던 송진우, LG나 두산의 팀컬러 얘기, 서용빈에 대한 안타까움, LG가 이순철을 감독으로 기용하면서 어떻게 망가졌는지에 대한 얘기에서 우리 셋은 의기투합했었다. 그런데 당연히 올해의 관심사인 월드컵이 나오면서 좀 엉뚱하게 사건이 터졌다. 온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나 폴란드전의 한 골로 면죄부를 받았던 황선홍, 유럽에서 잘나가고 있다는 박지성, 이영표 등에 대해선 어차피 의견이 다를 만한 이유도 없었지만, 이동국이나 이천수 등이 도마에 올랐을 때에도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올해 월드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기 얘기가 입에 오르면 약간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는 최순호가 문제가 된 것이다. 월드컵 퍼즐을 맞추어 가던 우리 셋은 최순호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즉 어느 월드컵에 출전했는지에 다다랐을 때 갑작스레 적대적으로 변했다. S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최순호랑 황선홍이 함께 출전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당시 우린 미국 월드컵 때의 황선홍의 그 유명한 똥볼에 대해서 얘기중이었는데 뜬금없이 최순호가 그때 출전했다고, 심지어 한 골 넣었다고 우기는 S의 주장에 황당해진 T와 나는, 박창선이랑 같이 뛰어다니던 최순호가 미국 월드컵에 혹시라도 참가했다면 프런트로 갔을 것이라고 했지만 S는 의외로 강하게 반발했다. T랑 내가 잘 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최순호랑 황선홍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분명 월드컵에 함께 출전했으며(나중에 알아보니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최순호는 94년까지 장수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 오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S랑 T는 10만원 짜리 술내기에 들어갔다.
"흐흐... S야, 술 살 준비나 하거라."
"누가 할 소리. 이렇게들 정신이 없냐."
"둘 다 진정해. 근데 S 너 정말 생각 잘 해 보고 한 소리 맞어? 최순호 나이가 얼만데."
"시끄러.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그렇다. 난 사실 누가 이기든 떡이나 얻어먹으면 되지만, 요즘 직장에서 사장으로부터 전방위 쪼임을 당하고 있는, 그래서 약간 맛이 가서 헷갈린 게 틀림 없는 S가 나로선 안쓰러울 뿐이다.

고맙다, S야... 술은 잘 얻어먹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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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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